김명희 사모 부부가 포도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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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농사를 시작한 것은 교회의 재정적 부담을 덜고 조기 은퇴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포도밭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그곳은 사모에게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자리였고, 성도들의 삶을 이해하는 자리였으며, 남편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인 학교가 됐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지난해 첫 머루포도를 수확하던 날, 사모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초보 농부가 처음 지은 농사였다. 제대로 갖춘 것도 없었고,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샤인머스캣 가격 하락으로 한 해 농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머루포도가 잘됐다. 수확량도 좋았고 판매도 순조로웠다.
“정말 대박이 났어요. 생각지도 못했어요.”
포도나무에 싹이 나고 꽃이 피는 과정도 신기했지만, 초록색 포도알이 연보라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더 특별했다.
“밭에 갈 때마다 포도송이가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일이었어요.”
첫 수확을 손에 들었을 때 사모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흘린 땀과 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깜짝 선물 같아요.”
■포도밭에서 만난 ‘세상’농사를 지으면서 사모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늘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편협함이 있었다.
“저는 주님을 만난 경험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 채 구습에 매인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개척 초기에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전도에 매달렸다.
‘교회가 부흥하면 된다.’
그것이 사모가 생각했던 신앙의 전부였다.
그러나 포도밭에서 땀을 흘리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가족을 책임지고, 경제적인 문제와 관계의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주일이면 교회로 나오는 성도들의 삶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발버둥치며 치열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됐어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을 회개하게 됐어요.”
포도밭은 사모에게 세상을 경험하게 한 ‘회초리’였다.
그리고 그 회초리는 오히려 사모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편을 다시 바라보다포도밭은 부부에게도 특별한 공간이 됐다.
집에서 밭까지 50분. 그 긴 시간 동안 부부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동안에는 서로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다. 남편의 부족한 점만 지적하며 불평했던 때도 있었다.
“왜 농사를 시작해서 남들 안 하는 고생을 사서 하나.”
“시집 잘못 와서 이 고생을 하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농사를 짓고 땀을 흘리면서 남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교회의 영적 아버지이면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남편의 모습이 어느 순간 안쓰럽게 보였다.
“남편이 참 수고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도밭에서 부부는 다시 서로를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사모였지만 밭에서는 똑같이 땀 흘리는 농부였다.
농사는 부부를 동역자로 묶어주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포도밭을 통해 사모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변화는 예배를 섬기는 일이었다.
그동안 반주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사모가 직접 예배를 돕는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제게 이루어졌어요.”
부족하지만 예배를 돕는 일이 목회자 남편에게도, 교회에도 은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농사지은 포도를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나누는 일도 기쁨이었다.
“늘 대접만 받다가 우리가 농사지은 포도를 나누게 되니 감사했어요.”
포도는 자연스럽게 전도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농사를 통해 얻은 수입도 가정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고한 대가로 수입이 주어지니 위축되고 초라하게 느껴졌던 저의 삶과 가정에 자신감과 활력이 살아났어요.”
사모는 농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목회의 어려움으로 인한 경제적·정신적 위축이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우울증이나 자기비하 같은 낙심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남편의 선택과 결정이 참 고맙고 감사해요.”
■“주님보다 앞서 달리던 저를 멈추게 하셨습니다”사모는 농사를 통해 성령님의 일하심을 매 순간 경험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주님보다 앞서 달리던 저를 멈추게 하신 것 같아요.”
목회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모에게 하나님은 포도밭이라는 새로운 일을 맡기셨다. 육신은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다.
농사를 통해 남편을 다시 발견했고, 성도들을 이해하게 됐으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됐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가지치기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야 하듯, 사모 역시 포도밭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이제 포도 농사를 열심히 하려고요”
사모는 관광과를 졸업하고 호텔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하기 싫어 탈출구를 찾던 중 신학생과 결혼을 결심했고 사직서를 냈다.
당시 총지배인이었던 장로가 사모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돌짝밭 길이며, 가시밭길이다.”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이제 26년의 목회를 지나 조기 은퇴를 준비하는 시점에 와서 사모는 말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개척이라는 쓰고도 달콤한 울타리 안에서 좌충우돌하며 달려왔다. 이제야 목회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데 어느새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먼저 은퇴한 선배 목회자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나는 끝났는데 너희는 이제부터 어떡하느냐.”
그러나 사모는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이다.
주변에서 늦은 나이에 포도 농사를 짓는 것을 걱정할 때 사모는 이렇게 답했다.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했고, 이제 포도 농사를 열심히 하려고요.”
그 말 속에는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담겨 있다.
■세 가지 기도 제목
목회와 농사의 시간을 지나며 사모에게 남은 기도 제목은 세 가지다.
첫째는 강동교회가 날마다 성장해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둘째는 자녀와 후손들이 대대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셋째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소망이 더 있다.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저의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포도송이처럼 맺혀가는 하나님의 시간
포도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지 않는다.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작은 열매가 맺힌다.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마침내 검붉은 포도송이가 된다. 사모의 삶도 그랬다.
2000년 작은 개척교회에서 흘렸던 눈물은 26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포도밭의 땀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고, 목회의 좌절도 있었다.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회개해야 할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으셨다.
목회자의 아내였던 사모를 포도밭으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성도의 삶을 알게 하셨다. 남편을 다시 바라보게 하셨고, 자신의 믿음을 새롭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한 송이의 포도를 쥐게 하셨다. 그 포도송이는 농사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열매였다. 사모의 고백처럼 모든 것은 주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나아가시면 어떨까요.”
오늘도 강동면의 포도밭에서는 사모의 손길이 포도나무를 돌본다. 뜨거운 햇볕 아래 땀을 흘리면서도 사모는 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밭으로 우리를 보내시고, 그곳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은혜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기도한다.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