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가 맥을 못 추고 물러갈 즈음, 청년들과 함께 후쿠오카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오무라 스즈타감옥터, 호우코바루 처형장, 26인 성인 기념관 등을 다녀왔다. 엄청난 박해 가운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을 보면서 숙연해졌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태해진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마지막 날은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을 방문했다.
1945년 8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실전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그 후 3일 지난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로 인해 히로시마에서는 14만명, 나가사키에서는 7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두 차례의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 제국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광복절)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전쟁 참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선지식을 가지고 원폭 기념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원폭 투하로 인해 멈춰진 시계, 피폭으로 피부병에 걸린 사상자들. 원폭 화염으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 타버린 시신들. 당시의 끔찍한 현장을 여과 없이 전시해 놓았다. 무고한 피해자들의 아픔이 예리한 송곳으로 가슴 찌르듯 느껴진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왜 원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원폭으로 인한 참상과 당시 상황이 사진과 글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지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우리는 전쟁의 피해자요, 연합군들에 의한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내용만 장황하게 설명되어 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동아시아 지역과 더 나아가 전세계에 대해서 저지른 끔찍한 일은 하나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저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를 ‘피해자 코스프레’라고 부르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연쇄, 침략 전쟁, 강제 동원 및 학살 등으로 인해 사망한 전체 인원은 최소 2,000만 명에서 최대 3,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의 절대다수는 일본 군인이 아닌 우리나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민간인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최소 이러한 내용조차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에는 없다. 그저 자신들은 무고한 시민이요, 피해자일 뿐이라고 하소연한다.
물론 전쟁을 끝내려고 원폭을 투하한 일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2차대전 당시 일본이 피해자만은 아니다. 그들은 분명 가해자였고, 그들 손에 죽어 나간 수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제국주의 원흉이기에 원폭을 맞았다는, 가장 단순한 역사적 사실까지도 기념관 안에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다.
오늘날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보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사과하기는커녕 변명만 늘어놓는다. 이들에게는 후안무치라는 말이 딱맞다. 일본인들은 끝까지 전쟁의 역사를 부정한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오직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과거 제국주의의 잘못된 역사를 부정하고, 끝까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전쟁을 일으킨 잘못을 인정하고 마음을 다해 사과할 때, 그 땅에 소망의 빛이 임하게 될 것이다.
기념관을 나오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늦더위 텁텁한 여름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울적하다.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한여름 얼음냉수와 같은 시원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욕심이 아닌, 자연스러운 갈증이다.
“주여 우리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시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