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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경남·부산·울산 기독교 역사 재조명 ②

성재효 장로 기자 입력 2026.09.21 11:32 수정 2026.09.21 11:36

한국 기독교의 시작

일제에 항거하며 투옥·추방되기도
귀출라프, 주민들 성경 나눠주며 전도

데이비스 조선행에 영향 끼친 5명
월푸, 조선 선교사 파송해달라 호소
매카트니, 청년들에 선교 열정 선사
어윙, 영국 신학 공부 지원 나서
존 로스, '예수 성교 문답서' 번역 인쇄
토마스, 죽음 앞에서 성경책 전달

존 로스의 노력으로 조선 땅에는 선교사보다 먼저 조선말로 번역된 성경이 보급되었다. 사전은 선교 사상 최초로 선교사가 없이 자생으로 세워진 황해도 '소래교회'
존 로스의 노력으로 조선 땅에는 선교사보다 먼저 조선말로 번역된 성경이 보급되었다. 사전은 선교 사상 최초로 선교사가 없이 자생으로 세워진 황해도 '소래교회'
국내 최초 해외 선교사 '귀출라프'
국내 최초 해외 선교사 '귀출라프'
1. 개요
 한국 기독교 역사는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 주도로 기록되어 있다.

 
1882년 한미통상 조약이 체결되면서 83년 미국 총영사관이 개설되고, 그 이듬해 9월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외교관 자격(의사)으로 내한했다. 알렌은 병원을 세우는 데 필요한 스태프진 구성 명목으로 다음 해 4월 2일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를 불러들였다. 이후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를 주도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결국 한국 선교 역사가 이들에 의해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한국 기독교 역사서에 경남 지역을 맡았던 호주 선교부의 활동은 극히 일부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선교 역사는 미국 선교부의 역할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영국 장로교의 영향을 받았던 당시 호주 선교사들은 미국 북 장로교 주도의 선교사들에 비해, 올곧은 신앙으로 경남을 변화시켰고,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제에 항거하여 순교한 주기철 목사, 사랑의 원자탄으로 대변되는 손양원 목사와 같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목사들은 호주 선교부의 유산이다. 호주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인을 선동한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제 추방됐다.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의 강제 추방은 호주 선교부가 1차 대상이었다.

2. 국내 최초의 해외 선교사 「귀출라프」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해외 선교사는 1832년 7월 22일 충청남도 서해안 고대도를 방문한 귀츨라프(독일인) 선교사가 최초였다. 중국 선교사로 있던 그는 동인도 회사 소속 상선 「로드 애머스트 호」 통역 담당으로 탑승하여, 고대도에 도착한 후, 정부의 입국허가를 기다리며 20여 일을 머물렀다. 이때 한문 성경을 주민들에게 나눠주었고, 주기도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체류하는 동안 주민들에게 감자 재배와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한글 자모 글자를 최초로 서양에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입국 승인이 거부되자 8월 11일 떠났다.

그 이후 33년 뒤 1865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토마스 선교사가 서해안을 거쳐 백령도에 밀입국하여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나눠주며, 전도했다. 이 방문에 주민 관심이 많다는 소식을 중국에서 조선 상인으로부터 접한 후 다음 해인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평양으로 가려다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참수당하고 만다.

 
이후 18년 뒤에 알렌 선교사가 미국 영사 개설에 따라 의사이면서 외교관 자격으로 입국하였고, 경남 선교는 알렌 이후 5년 뒤 호주의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데이비스 선교사 대학 졸업 사진
데이비스 선교사 대학 졸업 사진
제3부. 경남 선교의 시작
 1. 경남 지역의 선교사 활동
  경남 복음의 역사는 호주 선교부의 역사다. 1889년 10월 2일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가 파송한 조세프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가 누나 메리 데이비스와 함께 당시 부산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다.

데이비스 이전 1888년 12월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학생 자원 운동(SVM)의 영향으로 이 학교 출신 게일 선교사가 캐나다 순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함경도를 거쳐 데이비스 선교사가 도착하기 직전 부산에 도착했지만, 그 뒤에도 선교사로서 활동보다 문학 서적 번역(천로역정 등)에 집중했고, 이후 1892년 1월부터 시작된 선교지 분할 협정으로 그해 3월 후배인 하디 선교사와 함께 원산으로 떠났다.


91년 12월 호주 선교부 2차 파송 선교사가 도착하기 전 부산에 도착했던 미국 북 장로회 소속 베어드 선교사도 95년 대구지부 결성을 위해 떠나면서, 이후로는 호주 선교사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있을 당시에는 호주 선교부와 공동으로 부산지역 선교뿐만 아니라 경남 일대의 순회 선교도 있었지만, 2개의 선교부가 지역을 가르지는 않았다. 베어드는 부산의 북부지역, 밀양, 양산, 창녕 등지를 집중 순회했고, 밀양은 95년 대구지부가 설립된 뒤에도 한동안 관리를 계속했었다. 경상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1896년 8월 4일 이후는 대구부 소속이었던 밀양이 경남으로 편입돼 이후는 경남도 전역을 호주 선교부가 맡는 것으로 양해됐다. 다만 미국의 북 장로교는 부산에 의료선교 위주로 활동을 계속했고, 1914년까지 21명의 선교사 파송이 있었으나 호주 선교부 활동에 묻혀 버렸다.(이상규 교수 논문 : 부산지방에서의 기독교 전래와 교육·의료활동)

데이비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복병산
데이비스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복병산

2. 데이비스는 「한 알의 밀알」
데이비스는 부산을 거쳐 서울(당시 한성)로 간 후 5개월 동안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조선어 공부를 하고, 걸어서 부산으로 향했다. 20여 일 만에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폐렴과 천연두가 겹쳐 다음 날 5일 소천했다.

선교의 꿈을 펴지 못하고 33세 7개월의 젊은 나이에 소천한 그의 삶은 선교사로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사후 호주 교회는 1891년 2차로 5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등 해방 전까지 76명, 해방 후 48명 총 124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데이비스라는 「한 알의 밀알」은 경남에 2천 6백여, 부산에 1천 8백여, 울산에 650여 교회를 세우는 열매를 맺었다. (데이비스 남매를 포함하여 해방 전까지 파송된 선교사는 총 78명)

3. 데이비스가 조선을 선택한 이유
데이비스는 처음부터 조선 선교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 때 인도에 파송되어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누이동생 사라의 요청으로 인도에서 21개월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귀국하여 다시 대학에 복학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1881년 졸업과 동시에 「코필드 그래머」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학교의 기반이 닦이자 7년 만에 학교를 성공회 소속 목사에게 넘기고, 1887년 인도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월푸 선교사의 편지를 읽게 되고, 조선 선교의 꿈을 가진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88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6개월간의 신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누나 메리와 함께 조선 땅을 향했다.

4. 데이비스의 경남 선교에 영향을 준 분들
이제 데이비스가 조선 선교의 꿈을 가지게 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조선행에는 5명의 조선 선교에 열정을 가진 인물이 영향을 끼쳤다.

월푸 선교사의 편지
월푸 선교사의 편지
1). 월푸(John R. Wolfe) 선교사

데이비스가 한국 땅을 밟게 된 일차적 동기는 당시 호주에서 발행되던 선교 잡지에 실린 중국 선교사 월푸의 편지였다. 월푸는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안식년을 맞아 일본을 거쳐 부산에 들렀다. (84년 10월, 85년 11월에 이어 87년까지 3번을 다녀갔다) 그의 첫 방문은 단순히 안식년을 맞아 다녀가는 일정이었지만, 2번째는 부산에서 선교 활동이 가능한지에 대한 사전 답사 형태로 10여 일 머물기도 했다. 

 

87년도에는 일본에서 파견한 매서 인으로부터 경남에 2천여 권의 성경이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남부지역에 반입되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영국 선교부에 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했다. 그러나 영국 선교부는 당시 중국에 집중하던 중이어서 여력이 없다고 거절했다. 월푸는 호주의 매카트니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월푸는 30여 년간 중국 선교를 하고 중국 땅에 묻혔다.

2). 매카트니(H.B.Macartney) 목사

매카트니 목사는 월푸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자기가 발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Home and Abroad)」, 1888년 5월호 잡지에 게재했다. 인도 선교를 준비하던 데이비스가 이 편지를 읽고 조선행으로 결심을 바꾼 것이다.
매카트니 목사는 멜버른에서 성 매리 교회의 담임으로 1873년부터 잡지를 발간했고, 이듬해인 74년에는 호주에서 최초로 제1회 기독교대회를 개최하여,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연대를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 선교 열정을 심어줬다. 한국에 선교사 파송의 분위기를 만든 분이다.

3). 어윙 목사(John F. Ewing)
 어윙은 투락교회(Toorak Uniting Church) 목사였다. 투락 교회는 장로교 교회로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누나인 메리가 다니던 교회이고, 메리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이기도 하다. 또한 누나 메리가 어윙 목사를 소개하여 영국에서 데이비스의 신학 공부를 도와준 교회이기도 하다.
어윙 목사는 당시 성 매리 교회의 담임이었던 매카트니(H.B.Macartney) 목사와 함께 호주의 젊은이들에게 연합 활동과 해외 선교사의 꿈을 갖도록 청년운동을 주도했고, 데이비스를 만나 흔쾌히 영국 신학 공부를 지원했다. 당시 데이비스는 가족이 출석하고 있던 옥트리 교회(Oaktree Anglican Church)가 성공회 소속으로 그에게 선교사가 되려면 교회 봉사를 요구했고, 월프 선교사의 편지를 읽고 마음이 급했던 데이비스는 어윙 목사를 만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어윙은 데이비스가 한국을 떠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2024년 3월 필자를 비롯한 경남성시화 운동본부 임원진이 투락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역사 기록관 파밀러 윌슨 여사(Pamela Wilson)를 만났고, 여사는 당시 어윙과 데이비스의 관계를 소상하게 소개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교회가 파송한 메리에 관해서도 자랑했다.)

존 로스 선교사
존 로스 선교사
4).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
 당시 데이비스의 결심이 바뀌게 된 것은 단순히 월푸 선교사의 편지만은 아니었다. 데이비스는 어윙 목사의 도움으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 1888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만주에서 활동했던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났다. 당시 존 로스는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각계의 도움을 요청하며 활동하던 중이었다. 데이비스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존 로스의 조선 선교 열정이 맞아 둘은 많은 대화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데이비스는 한국 선교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당시 존 로스는 조선 땅에서 선교하지는 못했지만, 만주에서 최초로 한글판 성경을 번역하고 이 책을 북에서 평양과 서울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을 거쳐 당시 경남 땅에 들어오게 했다.

 
존 로스는 에딘버러 신학생 시절인 1866년, 대동강 변에서 참수당하여 한국의 기독교 첫 순교자가 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소식을 전해 듣고, 조선 선교의 꿈을 꾸게 되었다. 존 로스는 세 살 선배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은둔의 극동지역에 누가 복음을 전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신학생 간에 공유하면서, 자기가 조선에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존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누가복음과 예수 성교 문답서
존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누가복음과 예수 성교 문답서
존 로스는 대학 졸업 후 아내와 함께 중국 선교사를 자원했고. 그는 조선인들을 만날 만주로 향했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국경선이 폐쇄되었지만, 단둥 지역의 「고려문」이란 지역은 통상을 위해 년 중 6개월간 개방되었고, 그는 고려문에서 조선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했다. 

 

한편으로 조선말을 배우고 1881년에 처음으로 「예수 성교 문답서」를 번역하여 인쇄하는 데 성공했고, 82년에는 누가복음 3천 권을 출판했다. 이 책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과 한성으로, 일본을 거쳐 경남으로 전해졌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번역본과 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이수정에 의해 번역된 쪽 복음서 수천 권이 일본을 통해 경남에 뿌려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1882년 일본을 방문했던 이수정이 미국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전해 듣고 개종하여 성경 한글 번역을 하고, 유학생을 상대로 전도 활동하였다.)

 

존 로스 선교사가 개척한 중국 동관교회 본관. 이곳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존 로스 선교사가 개척한 중국 동관교회 본관. 이곳에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기념관에서 손을 잡고 통성기도하는 성시화 임원들
기념관에서 손을 잡고 통성기도하는 성시화 임원들
존 로스의 노력은 조선 땅에 선교사가 첫발을 디딘 1884년 이전에 성경이 먼저 들어오게 했다. 선교사 없이 그 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이 들어간 것은 선교 사상 유례가 없는 사례다. 더욱이 황해도 소래에는 선교사 없이 자생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존 로스로부터 성경 공부를 하고, 성경 번역을 도왔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세운 교회다.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 마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입국 2년 전의 일이다.)


당시 선교사가 없는 가운데서도 성경이 사람들의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한문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로 번역돼 그 자체가 복음이기도 했다. 존 로스는 한글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한 셈이다.


토마스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5).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는 목사인 아버지 교회의 파송을 받고 중국으로 갔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중 조선 선교에 눈을 돌린다. 1865년 배를 타고 황해도 연안 도서(백령도로 추정, 백령도에는 현재 토마스 기념관이 있다.)를 돌면서 성경을 전했다. 그리고 그 후에 자기가 준 성경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조선 상인의 소식을 전해 듣고 조선에 들어갈 궁리를 하게 되고, 1866년 미국 상선 셔먼호를 타게 된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의 입국을 금하고 있는 상황에서 입국이 거절되고,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불타고, 토마스는 참수당했다. (9월 5일 쑥섬) 그의 나이 26세, 그는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인 관리와 한 소년에게 성경책을 전했다.

다음 호 예고 :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③
 

편집자 주 --------------------------------------------------

글과 사진은 기존 경남·부산·울산 기독교 백서를 참고했고 선교사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은혜의 증인들'(존 브라운 지음/정병준 옮김)과 '진주 노회사'(박용규 이영식 조헌국) 역사편을 참고했다. 사진은 백서에 기록된 대로 무단 사용이 금지된다. 사진의 권리는 여전히 권순형 크리스챤 리뷰(호주 발행) 발행인에게 있다. 역사 사진을 사용하려면 다음 주소로 연락하여 승인 받은 후 사용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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