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는 시간 속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리적 흐름의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와,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의미 있고 특별한 기회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똑같이 흐르는 물리적 시간 속을 바쁘게 살아갑니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내 일과 목표에만 몰두한 채 ‘크로노스’의 함정에 빠져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크로노스의 시간 속으로 걸어오셔서, 한 인생을 향한 ‘카이로스’의 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는 것은 얼핏 우연한 물리적 이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롭고 갈급한 한 사람, ‘삭개오’를 찾아오신 필연적인 사랑의 시간이었습니다.
1. 고난의 ‘크로노스’를 은혜의 ‘카이로스’로 바꾸시는 하나님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십니다. 사방이 막힌 듯할 때 허락하시는 우연한 만남, 큰 사고 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게 지키시는 은혜는 모두 크로노스의 일상 속에 침투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순간들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발견해야 합니다. 새벽에 욥기를 묵상하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열 자녀와 전 재산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간 채 온몸의 질병으로 숨만 쉬고 있던 욥의 비참한 현실은 숨 막히는 고통의 ‘크로노스’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순간마저도 사탄이 그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자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은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정금같이 나아가게 하실 카이로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러한 인생의 신비를 고린도후서 1장 8~9절을 통해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고, 살 소망이 끊어지며, 스스로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절망의 자리는 눈물 가득한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다음 구절에서 “(이는)”이라는 단어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연결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고난의 숨은 의미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즉, 절망의 크로노스는 나를 죽이려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훈련이자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2. 최종 목적지보다 중요한 ‘여정의 행복’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최종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일 중독과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정작 목표를 이루었을 때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쳐버려 후회하곤 합니다.
우리는 늘 바빠야 하고, 돈을 써서 거창한 이벤트를 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세상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오늘이라는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소박한 대화, 아이들이 한방에서 부대끼며 웃고 울던 시간 속에 진짜 카이로스의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 있고 일상이 지속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늘만 주시는 최고의 행복한 순간들을 분주함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3. ‘내가 난데’를 내려놓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신앙
세리장이자 부자였던 삭개오는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었지만 내면은 고독으로 신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소유의 절반을 나누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변화될 수 있었던 비결은 체면을 버리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는 ‘내려놓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년에 누구였는데”라는 교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없습니다. 아람의 군대 총사령관 나아만 장군도 화려한 겉모습 속에 나병을 숨긴 채 교만을 부리다가, 결국 자기를 내려놓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을 때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려 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이처럼 춤추며 찬양했던 다윗 왕의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의 이목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것, 이것이 진짜 신앙의 신비이자 능력입니다.
맺으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화가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입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의 자리에서 ‘내가 난데’라는 마음의 빗장을 풀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신앙의 태도를 바꾸십시오. 아멘을 힘있게 하고, 다윗처럼 기쁘게 찬양하며, 한나처럼 간절히 기도하고, 바울처럼 복음을 전합시다.
밀려오는 업무와 고난의 크로노스 속에서, “(이는)”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발견해 냅시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일상 속에서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