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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8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3:58 수정 2026.01.15 13:58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8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양재한 장로
양재한 장로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8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문학박사, 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현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3. 십자가의 길, 맹의순
2) 맹의순의 목회사역 - 계속
맹의순은 성경공부를 통해 전쟁포로들에게 성경과 신앙을 가르쳤다. 성경공부 시간에는 주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에 적게는 20-30명, 많게는 100여 명이 모였다. 또 맹의순은 전쟁포로들인 광야교회 교인들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제송환에 대한 불안 등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고 심방하며 돌보는 삶을 살았다. 그가 갇힌 부산포로수용소의 제4수용소(내과병동)는 환자포로로 가득했다. 수용소 내 의료진은 넘쳐나는 환자를 제대로 돌볼 여력이 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맹의순은 아픈 환자들을 찾아가 정성껏 치료하며 돌보았다. 문명철은 그의 책에서 맹의순이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돌보는 사랑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기쁨으로 일하는데, 그가 하는 일은 흉내 내기조차 힘들었다. 어디에서 그 같은 힘이 샘솟는지 그렇게 일을 하면서 도대체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맹의순은 수용소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포로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항상 불안해했다. 다른 수용소로 옮겨질 가능성, 강제 송환으로 북한으로 끌려갈 가능성도 있었다. 포로송환을 위한 면담이 진행될 즈음 포로들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군에게 탄원서(Petition)를 써서 남한에 남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로 중에는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더욱이 영어로 말하고 글을 쓰는 포로는 극히 더물었다. 이를 위해 맹의순은 광야교회 교인들 가운데 북한 출신 포로들에게 탄원서를 써주는 목양사역도 하였다.
맹의순은 여자포로수용소에도 교회를 개척해 예배를 드렸다. 당시 여자포로수용소에는 친공포로들이 많았기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친공 포로들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맹의순은 자신에게 기회가 허락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맹의순은 포로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광야선교학교(Mission School)를 세워 광야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일반포로에게도 열린 교육의 장을 열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난 1952년 1월5일 광야선교학교 신년 인사말에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과 공의 그 자체를 위하여 살고, 예수를 믿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을 가르친 곳이 광야선교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2년 2월19일 일기에는 광야선교학교가 변질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요즈음 학교가 형편이 없다. 그래서 저녁에 직원회의를 열고 반성과 새계획을 짰다. 학생 증원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어디까지나 성인학교로 되지 않을 터” 라고 다짐하고 있다. 이는 광야선교학교(Mission School)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2월21일 광야선교학교 개교식에 약 120명의 학생이 모였다. 그런데 선교학교 운영 성격에 대해선 계속 회의감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이렇게 되면 학교성격은 좀 변질됨을 느낀다. 종교와 교육의 관계는 어떠한가? 저들이 성경과목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이 교원들과 학생들을 가지고 광야학원이 선교학교(Mission School)로서 실질적으로 존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목회자 맹의순의 삶
다음은 광야교회에서의 목회자 맹의순의 삶을 들여다본다. 1950년 9월16일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 제4수용소(내과 병동)에 수용된 것으로 봐 수용될 당시부터 맹의순의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의순은 광야교회 목회자로서의 삶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는데, 맹의순의 일기를 토대로 김시규가 그의 논문에서 주간일정표를 작성해 소개하고 있다.
맹의순의 ‘광야교회 목회 주간일정표’에는 새벽기도회 인도를 시작으로 오전에 여자수용소를 심방해 예배를 드렸다. 이후 제4수용소로 돌아와 광야교회 낮 예배 준비, 이어서 낮 예배 설교 후 예배가 끝나면 찬양대 연습을 지도하고, 수용소 내 영창을 방문해 복음을 전했다. 저녁이 되면 교인들과 저녁예배를 드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사역을 마무리하였다. 주중에도 쉴 틈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쟁포로 신분이자 광야교회 목회자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남대문교회 성도들은 맹의순이 억울하게 포로가 되어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51년 1·4후퇴 후 배명준 목사가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에 가서 맹의순을 면회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배명준 목사는 맹의순은 인민군이 아니고 조선신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며 남대문교회 장로 아들이라는 것과 중등부 교사라는 것을 증명하여, 포로수용소 당국과 석방교섭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수속을 마치고 수용소로 찾아갔을 때 맹의순의 대답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두고 여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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