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외성 교수 마산중앙감리교회 원로장로 전 경남대 교수 창신대 석좌교수 현재 경남평생교육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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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기에 사람들은 잘 살고 싶어한다. 현재와 미래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계획하고 준비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경험으로는 이것을 달성할 수 없다. 나 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의 고비마다 직면할 수 있는 장애물과 과제를 해결하고 넘어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인생의 선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생의 선배들 역시 나의 인생 살이와 다르다. 역사적 시대적 여건이 다르고 그들이 살아간 지역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 적절한 맞춤형 제언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우기 나의 인생 선배가 가진 개인의 성격과 가족 및 역량의 차이는 나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철저히 개인의 경험으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준비하고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방면의 인생 선배들이 남겨놓은 저작들을 통해, 어느 지역이나 어느 시대에도 적용가능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제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인생의 처세술에 관련된 책 역시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보편적이고 기본적으로 중년을 지나고 장년기와 노년기, 특히 장수시대에 있어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대하여, 저명한 부부 학자가 집필한 책 『인생의 아홉단계』를 간단하게 설명하여, 이 시기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삶의 주기’이론으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이 자신의 부인인 조앤 에릭슨과 함께 나이 들어감에 따라 직면하였던 경험과 생각을, 새롭게 첨가하여 기존의 인생주기 8단계에서 9단계로 수정하였다. 에릭슨은 젊었던 시절 1950년(48세)에 『유년기와 사회』라는 책에서, ‘삶의 주기’이론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른 내용을 출판하였다.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70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인생의 마지막 단계가 8단계로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장수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리고 에릭슨과 그 부인인 조앤 에릭슨 역시 장수하면서 자신들이 발표하였던 삶의 주기를 8단계에서 9단계로 수정하여 발표한 책이 바로 1982년에 출판한 『인생의 아홉단계』이다. 이때가 에릭슨이 80세이고 그는 1994년 92세에 죽었다. (확장판은 1997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에릭슨 자신과 그의 부인인 조앤 에릭슨이 80세를 바라보면서 함께 집필하였는데, 기존의 자신들의 이론을 수정한 셈이다.
그들이 기존에 제안하였던 삶의 주기이론에서 8단계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로서, 65세 이상 노인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동안 수행해야 하는 삶의 과제들이 있다. 에릭슨은 이 사회심리발달 단계의 사회심리적 위기를 통합(자아완성, ego integrity) 대 절망(경멸, despair)이라 요약하였고 이 단계의 덕목을 지혜(wisdom)라고 규정하였다.
8단계에서 노인들은 노화와 은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생산성과 창의성, 활력은 떨어지고 은퇴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게 된다. 여가활동, 가족을 돌보는 일,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서도 여전히 삶은 변화하고 발전해 간다. 새로운 일상에서 삶의 만족, 건강유지, 활력있는 삶의 유지 등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서는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를 회상하며,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 다왔던 것이 괜찮았는가? 하는 질문과 유사하다. 지나온 삶에 대하여 자신이 이루었던 업적과 과제를 생각하면서 과거를 스스로 성공적인 삶을 이끌어왔다고 생각하고 평가하면 자아 통합을 발달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만족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고 관대해질 수 있다. 반대로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부족하다고 느끼고 생산적이지 못했다고 느끼면서 인생의 주어진 과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하면,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워하며 절망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통합이라는 개념은 일관성(coherence)과 완전함(전체성, wholeness)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8단계에서는 노화로 인하여 신체적으로는 세포, 혈관, 근육계를 연결시키는 활기찬 상호작용이 약화되고, 정신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에 대한 기억의 일관성이 점차 희미해져가고, 에토스의 측면에서는 생산력의 기능이 점진적으로 소실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이 통합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통합성은 노화로 인하여 생겨난 이러한 위험을 한데 모아 새로운 의미부여와 미래지향적 활동으로 연결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아완성과 성숙에로 나아가는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하고 살아왔던 과거의 삶을 일관성있게 한데 모으고 의미부여를 하며 그리하여 완전함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노년기인 8단계에서 중요한 덕목은 지혜이다. 지혜는 ‘바라보다, 알다, 듣다’ 라는 오래된 어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혜와 깨달음은 먼저 바라보는 것,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시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볼 수 없는 먼 곳을 상상하거나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고 또 살아갈 미래를 내다보기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수메르 언어로 귀와 동일한 말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단어는 enki였는데, 수메르 사람들이 섬긴 지혜의 여신이 그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여신은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귀를 땅을 향해 열었다. 청각을 통해 소리로 인간은 세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지혜는 시각과 청각 등 모든 감각을 통해 사물과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통합의 integrity는 그 어원이 촉각인 tact이다. 이 어원에서 접촉 contact, 손대지 않은 intact, 촉각의 tactile, 만질 수 있는 tangible, 접합하다 tack, 만지다 touch 같은 단어들이 유래한다. 통합 역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웅장한 건축물을 세우고 도구를 제작하며 하늘과 땅의 신성하고 강력하고 지혜로운 계시에 응답하는 것도 우리의 몸,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하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움직이고 이 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역시 현실에서 하는 일이다. 접촉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통합은 이 세상과 온갖 사물들, 특히 사람들과의 접촉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한다. 통합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며 우리가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고결한 목표이다. 다른 한편, 통합은 대단한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상의 활동을 관리하고 하루를 잘 살아내는 데 필요한 사소한 일들에 굳건하게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통합은 우리의 존재를 현실 세계로 이어주며, 빛, 소리, 냄새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접촉하게 해준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졌다. 모든 만남은 특별한 의미를 띠고 풍요로움을 제공해주거나 예상치 못한 가치있는 목표를 지향하게 해준다. 노년기에 갖추어야 할 것은 모든 관계에서 촉각과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긱과 깨어있음이다. 기지와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정신적 신체적 능력 저하를 가볍고 유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노년기는 새로운 우아함으로 깨어있음과 창의성을 유지하고 과거의 모든 경험을 모아 그 경험에 의지하기를 요구한다.
장수시대가 도래한 이후, 80대와 90대라는 새로운 인생의 발달단계가 필요해졌다. 에릭슨 부부는 이 시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새롭게 인생의 9단계를 설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노인들에게 새로운 요구와 재평가 그리고 일상의 여러 난관이 찾아온다. 이러한 도전들을 밝혀 9단계를 설정하여야 했다.
인생의 9단계는 최고의 관리를 받는 신체도 약해지고 예전처럼 기능을 다하지 않는다. 힘과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도 신체는 자율성을 지속적으로 잃어 간다. 제8단계에 나타나는 절망은 어떤 응급 상황이나 신체적 능력의 상실이 닥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9단계에도 가까이에 머무른다. 자립과 자기 통제가 어려워질 때 자존감과 자신감은 약해진다. 한때 든든한 의지가 되어준 희망과 믿음도 더는 예전 같은 견고한 버팀목이 아니다. 절망에 대해 믿음과 적절한 겸손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일지도 모른다. 특히 이 시기에는 부모나 친척 및 배우자 등 관계있는 사람들을 잃는 경험을 하면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죽음의 문이 열려있음을 알고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혜로부터 연결되는 초월(transcendence)과 영성(spirituality)에 이르는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초월은 말 그대로 우리의 인식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9단계의 노인들의 초월은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성을 넘어서 좀 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것, 혹은 이 세상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초월은 우주적 정신과 보편적으로 교감하며, 시간, 공간, 죽음에 대하여 새로운 정의를 하는 것이다. 9단계에 도달하면 노인들은 고립과 고독 가운데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돌아보고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며,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제 인생의 질주와 경쟁은 끝났다. 분주함과 긴장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 노년기에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다른 한편 영성이 깨어나고 중요해진다. 영성은 특정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본질을 탐구하고 내면적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더 높은 삶을 지향하는 태도와 성질을 의미한다. 노년의 초월에서 영성에의 길로 연결되어, 궁극적으로는 노년의 깊은 내면의 성장과 성숙, 통합에로 이르게 된다. 8단계의 지혜의 연장선상에서 내면의 평화와 안정, 다른 사람과 세상, 물질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초월과 영성을 경험하는 노년기에는 일상의 삶은 은거하고 고립, 고독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에서 놀이, 기쁨, 노래, 창의적인 활동 등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나이 듦은 특권이요 축복이다. 지나간 삶을 회상하며 긴 생애를 피드백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여생을 즐긴다. 사랑했고 열정을 가졌고 고난도 있었으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내려놓고 기다리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 순간이여, 여기서 멈추어라! 나는 기도한다. 하나님께!
* 추천자료
에릭 에릭슨·조앤 에릭슨 지음, 송제훈 옮김, 인생의 아홉 단계, 교양인,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