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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하나님의 부름대로 걸어온 삶의 길 - 새길동산요양원 이상익 이사장

이학규 기자 입력 2026.04.09 10:56 수정 2026.04.09 10:56

경남교계의 리더- 새길동산요양원 이상익 이사장

- 초ㆍ중학교에 재학 중 음악에 재능 보여 고교진학은 당시 유일한 밴드부가 있는 마산상고(현 용마고) 무조건 진학
- 아버지가 바이올린, 누나는 성악을 전공한 가족들 음악을 좋아하는 음악 용마고 특기생으로 수업료 면제
- 박정희 정권 3선 개헌과 유신헌법 발효로 정국 소용돌이 때 한양대학교 학생회 대표 활동 <민청학련사건>으로 구금
- 전두환 정권 때 대전교도소에서 출소, 당시 운동권 출신의 유화적 입장 윤보선 대통령 통해 고위직 제안 거절
- 어린이재단, 월드비전, 연탄 나눔 운동, 푸른아시아 등 인종을 초월한 어렵고 힘든 곳에 매월 24곳 일정액 기부
- 도공 상임감사 재임 시 , <함안휴게소 위치 변경>, <함안도서관ㆍ함안소방서> 부지를 함안군 소유로 전환
- 군북 3ㆍ1기념공원, 함주공원 내 음환경 조형물, 검암리 주민 편의 시설과 도로 확장 등 고향의 건의 사업 대부분 해결
- 새길동산요양원, 정부평가 11년 연속 전국 최우수 기관 선정, 이용자 중심의 돌봄 인정과 안정적 운영체계 성과

 

 

이상익(73)이사장은 칠원초등학교, 칠원중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초, 중학교에 재학 중에 음악에 대단한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당시 밴드부가 유일하게 있었던 곳이 마산상고(현재 용마고)였는데, 고교진학은 무조건 마산상고(용마고)로 정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하셨고, 누나도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해서 그의 가족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는 음악 집안이었다. 그는 용마고등학교에서 졸업할 때까지 특기생 대접을 받으며 장학생이란 이름으로 수업료를 면제받고 학교에 다녔다. 그는 자신이 가진 꿈대로 K대학교 음악대학 진학을 꿈꾸었으나 대학의 학과 조정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한양대학교 법정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음악 전공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그를 향해 찬송가를 불러주어야!
 그는 한양대학교 캠퍼스에서 대망의 꿈을 안고 대학 생활을 설계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가 가고 싶어 하는 길보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일까! 그가 대학생의 부푼 꿈으로 캠퍼스 푸르름을 가슴에 안고 있을 때였다. 그때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무척 불안한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과 1972년 유신헌법으로 엄청난 정치사회의 지각변동이 일어나서 교수,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까지 그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들었다. 그 당시, 그는 한양대학교 학생회 대표로 활동하다가 결국 <민청학련사건>에 계류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고 1975년 2월 마산교도소(현 장원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생활이 어렵고 무일푼의 신세로 힘든 날은 날로 가중되어 갔다. 민주화 투쟁을 하였던 벗들 중에 한 명, 한 명 이탈하여 직장으로 들어갈 때는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그때,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 화합의 의미에서 그에게 여러 차례 고위직의 자리에 정치 입문 제의가 있었지만 독재 권력의 사탕을 받아먹을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을 굽힐 수 없었다. 그의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다시 구금 생활을 하다가, 그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고 2년 뒤에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운동권 출신들을 유화적 입장에서 포용하려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통해 그를 정치적 고위직에 앉히려고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몸이 사회활동 할 수 있는 단계가 아직 아니다`라는 핑계로 윤보선 대통령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아마도 그때의 정치적 자리 제의는 상당이 고위직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정의의 길을 걷는 자의 외로움

 그는 일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 요청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야 하였기에 친구나 가족에게 손을 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형님이 함안 가야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고 경제적 도움을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만 하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길은 너무도 단순한 일이었다. 서울 정릉에 있는 고려중학교 3학년 가정교사로 들어가서 숙박과 용돈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일도 몇 달 후에 결국 기관원의 방해로 그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서울 을지로 입구 인쇄 골목에서 <샘문화사>라는 상호로 소책자와 번역 등을 하는 일을 하였는데 수감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날로 심한 상태였었다. 그때 마침 어느 선배가 YMCA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와서 마산 YMCA로 들어오게 되었고, 부모님이 계신 함안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차츰 생활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때 선배의 중매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내의 고생은 세월의 강을 건너온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상처가 내 가슴에서 지워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박혀있다. 아내는 당시 경남대학교 후문 쪽에 위치한 홍익재활원에서 근무하였으나 결국 기관원의 압력에 의해 그 직장을 그만둬야 하였다. 그 후 먼 밀양까지 출퇴근하며 간호사 일을 하여야 했고 화장품 판매, 그릇 장사, 옷 가게 등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왔다. 그런 바쁜 과정에서 자신의 애지중지 아이를 잃어버려 울며불며 헤매고 다녔던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아픔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 차가운 곳만을 찾아서

 그는 어두운 사회의 구석이 어디인지, 차갑게 떨고 있는 사람이 어느 곳에 있는지 그런 곳만을 찾았다. 그곳이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어린이재단>, <월드비젼>, <연탄나눔운동>, <푸른 아시아>등에 매월 24곳에 일정액을 돕고 있다.
 그의 손길에는 차가운 곳을 찾는 더듬이가 있을까! 그는 인도, 아프리카 등에 그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공부하는 양 자녀들이 여럿 있다. 그들을 20년 이상 돕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다른 곳으로 옮겨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에 가서 그 아이들을 보고 싶지만 여건 상 쉽지 않다. 그 아이들도 그를 보고 싶어 하고 있지만 간혹 서신과 사진이 가고, 오고 할 뿐이다.
 그는 월급을 받으면 아내에게 주는 생활비 외에는 대부분 이러한 사회의 어둡고 차가운 곳에 기부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3.15 의거의 주역 김주열의 이름을 딴 <김주열장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어렵고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찾아 도움을 주려 한다. 그의 모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 후배들에게 수여해 왔고, 2024년 올해부터는 전북남원의 김주열의 모교 금지중학교 전교생 13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같은 해 김주열 마산행사 때, 선생님과 그 전교생 13명이 다 참석하였다고 한다.

고향 함안을 사랑하는 그의 손길
 하나, 고속도로 함안 톨게이트, 고속도로 함안휴게소
 그가 <한국도로공사> 상임감사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함안 톨게이트와 기와집 톨게이트를 아라가야 고도답게 품위 있게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사항은 이미 함안군수, 군의회 의장 등이 수차례 도로공사에 요청했으나 이미 설계가 완성 단계에 있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당시 한국도로공사 상임감사로 있었기 때문에 이 사안을 위해 도로공사 설계 처장을 불렀다. 설계 처장은 이미 95%의 설계가 끝난 상황이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설계 처장에게 고향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지금도 그 난감해 하던 처장의 표정을 생각하면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해가 간다. 그때 당시 톨 게이트와 기와집 톨게이트, 도로 등 600억~800억을 들여 만들었다.
 고속도로 <함안휴게소>의 위치 변경은 그의 사업 중에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때 당시 함안휴게소가 진주<남강휴게소> 확장 이전 공사 설계로 확정되어 있었다. 그 일을 현재의 <함안휴게소>로 변경하기에는 무척 어려웠다. 당시 설계처장등 간부들도 변경을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라도 휴게소를 함안으로 이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진주시"와 `함안군`의 세수의 효용가치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우리 함안군의 세수를 올리고 휴게소를 통한 `함안`을 널리 알려야겠다는 욕심이 불덩이같이 치솟았다. 그때의 부하 직원들이 그에게 항의를 못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불편해했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고 한다. 아마 당시 누군가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를 들고나와 이의를 제기했다면 <함안휴게소> 이전은 불가능하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둘. 함안도서관, 함안문학관, 한문박물관의 건립
 이 세 건물의 부지는 원래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가 있던 곳이다. 함안군에 행정절차를 통해 일정 시간 후에 이첩되도록 당시 경남•부산본부장과 본사 해당부처간부에게 이야기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톨게이트를 현 위치로 이동시킴으로써 여러 경로를 거쳐 결국 우리 함안군 소유로 되었으니 참 잘된 일이었다.
 셋. 3.1절 기념공원, 음환경조형물, 주민편의시설과 도로확장, 파수도로개설
 그는 지방의 도로, 공원에 대한 애정도 많았다. 군북 운동장 건너 3.1절 기념공원 12억, 함주공원내 음환경조형물 3억, 검안 주민편의시설과 도로확장 초기7억(?), 함안면 봉성리 안쪽(파수에서 고개 넘어오는 곳)도로개설 3억(이것은 군에서 공사 하지 않아 국비 환수 조치함) 등의 유치를 위해 정부기관에 아쉬운 소리하면서 받아 내었던 것이다.
 넷. <세계민속 전통악기> 기증
 그는 함안인으로서 함안을 빛내기 위해여 멀리 통영, 제주도에까지 그의 손길을 벋었다. 그가 평생 수집한 세계민속악기를 10여년 전에 통영시에 442점을 기증하였다. 우리나라 <국립민속악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120여점의 7배의 악기를 가지고 있었다. 통영은 `윤이상국제음악제`가 매년 개최되어 세계의 음악가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자국에서도 구경 못하는 자국의 민속악기를 한국에서 구경할 수 있기에 우리나라의 자긍심을 고려하여 기증하였던 것이다.
 제주도청에서 `제주도에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만들어 관람료를 배분하면 어떻겠냐`고 그에게 제의가 왔다. 그는 당연코 `돈 필요없고 고향, 경남 떠나서는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나머지 3~4백점은 현재 자신이 경영하는 새길동산요양원에 전시 되어 있다.
 다섯, 예능에서 그의 재능
 그는 예능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났다. "합창은 즐겁다, 이상익작곡가와의 대화" -TBN.경남교통방송(FM95.5)에서 6개월간 합창소개 생방송 출연. 2023년11월부터 2024년 4월까지. 현재 약 600 여곡 작곡하였고 <한국창작가곡협회>의뢰 곡이나 행사발표 때 외에는 대부분 미발표작으로 되어 있다.
 여섯, 그의 저서
 - <이상익의 시적사유>(2015.11. 해딴에)
 - <나는 멸종위기 동물이 되기 싫다>(2023.2.수우당) 외 <창작동요집>, <창작 복음성가집>, 시집<더불어가기>4권외 10여권

세종문화예술대상 일성 이준 열사 상 수상 상패
세종문화예술대상 일성 이준 열사 상 수상 상패


그의 삶, 그의 길
 그는 모태신앙(母胎 信仰, be born a faith)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름으로 살아온 자이다. 그 정의로운 학생운동으로 인한 구금생활 등은 어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고, 그가 있었기에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불우한 음지의 그늘에서 떨고 있는 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벗는 자가 있는지 모른다.
 그는 현재 함안군 대산에서 새길동산요양원 원장으로서 숭고한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요양원 정신은 사랑, 섬김, 배려의 정신으로 120여 명의 직원고 180여 명에 이르는 어른신들을 모시고 있다. 따뜻한 마음과 신뢰로서 행복을 바탕으로 한 사랑, 진실되고 책임 욕구를 충족하는 섬김, 인정과 격려로서 같은 시선을 이루는 향기의 배려가 그의 `새길동산요양원`의 살아 숨쉬는 철학이다.
 사회복지법인 가야(이사장 이상익)는 지난 3월 27일 정부평가에서 11년 연속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어 화제이다. 정부에서 2011년부터 요양시설 평가를 선택적으로 실시해오다 2013년부터 의무평가로 전환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제도다.
 시설의 주요평가항목은 인력배치, 시설환경, 서비스부분, 어르신들의 이용만족도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평가 한다.
 여기에 발맞추어 이사장을 비롯한 모든 종사자들이 시설운영의 투명성과 이용자중심의 돌봄 서비스와 안정적인운영체계를 고르게 인정받은 것으로 11년 연속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선정은 지속적서비스개선, 투명한 운영 등 이상익이사장의 경영철학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상익이사장은 어르신들이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보호자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하는 요양원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2006년 이상익 시집 출판기념회(오른쪽에서 두 번째)
2006년 이상익 시집 출판기념회(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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