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기획
◇한국 사학(史學)계의 큰 별
이만열(89) 숙명여대명예교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숙명여자대학교에 교수로 근무하면서 국사편찬위원장(차관급)의 역임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역사학자이며, 교회사학자로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하는 한국에서 우리 시대의 석학(碩學)이다. 그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방문 교수로 초빙되어 강의하기도 했다.
그에게 역사에 대한 많은 저서가 있어 사학계에서 주목받는 역사학자이다. 그가 저술한 전공 서적으로 『단재(丹齋)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한국 기독교 의료사』 등이 있으며 이 서적들은 각 대학의 전공 교재로 선택되기도 한다. 이외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문학에도 애정을 가져 『한 시골뜨기가 눈 떠가는 이야기』 외 4권의 수필집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어떠하였을까?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고등학교 때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기도 했다. 대학 공부를 마친 뒤, 신학교에 가기로 하고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사학과에 입학한 후 서양사를 공부했으며 종교사,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의 강의를 들으며 신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 군대 생활에서 겪었던 작은 사건으로 그가 학문의 방향을 한국사 쪽으로 전환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한 장교가 그에게 한국사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그 물음에 대해 사학과 출신으로서 시원하게 제대로 답하지 못해 모욕감을 느꼈고, 이것이 제대 후 복학해서 한국사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사과정을 밟을 때, 신채호의 강렬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만열 교수가 국사학자가 되기까지 두 사람의 영향이 컸는데, 역사를 보는 거시적 시각을 깨우쳐 줬던 김철준(1923∼1989)과 역사 연구의 미시적 방법을 가르쳐 줬던 한우근(1915∼1999)이 그들이다.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입주 가정교사로 아이들 가르쳐
그가 이루어 놓은 대학교수, 국사편찬위원장 등의 찬란한 금자탑을 보면 그가 화려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고생이란 것을 모르고 순탄한 귀족적 삶을 걸어왔을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어릴 적에는 순진하고 천진스런 소년이었다. 왕복 10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닌 시골 아이였다. 군북초등학교 다닐 때의 어린 시절이다. 어린 나이에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소의 고삐를 잡고 뒷산에 올라가 가면 오후 3시 전후하여 멀리로 마산-진주 간을 잇는 기차가 폭폭 연기를 뿜어내며 산모롱이를 지나간다. 그는 그 어린 마음으로 ‘나는 언제쯤 저 기차를 한번 언제 타 볼까?’ 하는 꿈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어릴 때의 그 아련한 꿈들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를 품을 수 있는 인격을 키워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백이산, 성전암, 와룡정, 고바구절로 소풍 갔던 아련한 추억은 오늘날도 간혹 그립다고 한다. 그때, 그곳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무척 그리워 지금도 서로 소통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다. 어린 시절의 그 소박했던 코흘리개 친구들을 생각하면 문득, 문득 눈물이 솟구칠 때가 있다고 한다.
중학교는 마산에 있는 서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당시 서중학교(현재 마산중학교)는 경남에서 가장 명문 중학교로, 그 중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은 한 군(郡)에서 2-3명이 될 정도였다. 그 학교에 입학하면 천재의 소리를 들었다. 그 중학 3년을 함안군 군북에서 마산까지 기차로 통학을 했다. 어린 소년이 하루에 왕복 2시간 기차 통학을 하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은 둥 마는 둥하고 군북역까지 숨을 헐떡이며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겨우 기차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기차가 허연 연기를 뿜어내며 출발하는 아슬아슬한 통학을 3년 동안 한 것이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는 더욱 힘든 기간을 보내야만 했다. 고등학교, 대학은 정말 학문을 깊게 연구하는 학문 수련의 기간이다. 그는 그 기간에 입주 가정교사를 해야만 했다. 그 집에 들어가 가정교사로 아이를 가르치느라고 자신의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던 갈등이 컸을 것이다.
마산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시작한 입주 가정교사를 마산법원에 근무하는 김완석 판사 집에서 가정교사를 했다.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가 그 집에서 먹고 자야하고, 하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가정교사로 있으면 얼마간의 돈을 받게 되는데, 그 돈으로 책 등을 구입하는 용돈을 쓰게 된다.
다행히 대학 시절, 서울에서 입주 가정교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 집에서 아이를 가르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형석 교수의 훌륭한 인품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소할 곳 없는 그 시련의 벽을 넘어서
서슬 퍼런 신군부 시절 때의 이야기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때는 해직 교사. 해직 교수 등 우리 사회가 이념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시절이었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 당시 신군부의 명령은 법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양심있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으로 신군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4년간(1980-1984) 해직되었던 것이다. 숙명여자대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해직당한 그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살 수밖에 없었다. 지식인이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의 시련이었다.
사람에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것이 있다. 이런 해직 시기가 그에게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미국, 영국 등 해외로 건너가 한국 기독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게 되어 학문적 도약 과 그의 학문적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를 설립하여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신학생, 목회자들이 미국이나 영국 등에 가지 않고 자체 연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이 시련의 과정에서도 자신이나 사회를 한 번도 원망하거니 불평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겪은 일 중, 다소 어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 시련을 통해 다른 형식의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성품을 갖게 되어 인생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겸손되게 말하고 있다. 만약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작은 어려움을 통해 많은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 어려움에 동참할 수 있는 인격을 갖게 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국에서 고난의 시기를 넘기고 한국에 돌아와 가정 먼저 한 일은 회년선교회의 일이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를 돕는 운동에 관여하여 20여년 이상 참여하게 되었다. 남을 도우며 그의 일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는 이런 봉사적 일들은 자신이 겪은 그런 어려움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아주 겸손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황혼의 수채화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그는 해직교수등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을 잘 다스려왔다. 물론 부인의(碧珍 李氏) 뜨거운 사랑의 보살핌이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중 큰아들은 유학한 후 최근까지 대학교수로 있다가 어느 통계연구소 대표이사로 영전되어 갔으며, 작은아들은 의학을 전공하여 흉부외과(심장)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 손주 다섯 명이 아주 영특하게 자라고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 후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는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적 전공 서적, 수필집 등의 저술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저술한 수필집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2010, 지식산업사),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2015. 포이에마), 『역사의 길, 현실의 길』 (2021, 푸른역사)
이 명예교수의 고향은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이다. 고향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마지막 심지의 불꽃처럼 타고 있다. 중서부 경남이 옛 가야의 전통을 지녔던 곳이었고, 근대에는 한국의 재벌(삼성, 효성 럭키 등)이 많이 일어난 곳이다. 지난 세기말까지 가야의 전통을 살리는 운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중서부 경남의 가야사를 탐구할 계획을 세우고 열정을 쏟았으나 여의치 않아 손을 놓았다. 지금도 가야사에 대한 연구에 뜻있는 분들이 있으면 학술기관을 설립하고 장학재단을 마련하여 인재를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심지에 불꽃을 지펴 보기도 한다.
지금도 구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많은 초청강연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원고를 보지않고 3~4시간 강의를 한다. 그 만큼 철저한 강연으로 그의 말 한마디 마다 알맹이가 있다.
그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길을 등불처럼 밝혀준 분들을 그의 메모장에 기록해 두고 시시때때로 마음속으로 불러본다는 것이다. 어릴 때 막내 자형 배인순, 그는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에 가서 공부하다가 6.25 때 납북되었으나 어릴 때 자신의 꿈을 키워주었던 자상한 형님이었다. 마산중학교 시절 자신을 신앙으로 다잡아 주신 숙모님 조 점시 권사(제일 신마산교회)도 기억 속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중•고등학교 때 존경하는 스승은 허대로, 제갈삼 선생님, 고등학교 때 이상철 교장선생님과 조필대, 이훈경, 김상옥선생님, 대학에서 학문 및 인격적으로 영향을 끼쳐주신 분으로는 金庠基 교수와 김철준, 韓㳓劤, 안정모 교수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