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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김동길 교수 연재 21 -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7.06 14:46 수정 2026.07.06 14:46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김동길 교수 연재 21
:강성갑 교장 순교한 밤, 사선(死線)의 인연들

양재한 장로
양재한 장로
김형석 교수가 피란길에 찾은 한얼중학교, 그리고 사택에서 보낸 하룻밤 사선(死線)의 인연들, 선생의 저작과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선생의 스테디셀러 『백 년을 살아보니』의 소제목 ‘표정은 밟게 얼굴엔 미소를’이란 칼럼이 실려있다. 이 칼럼은 황광은 목사를 소재로 황 목사가 심장병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소식을 듣고 병문안한 일화를 담고 있다. 황 목사는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문안 온 김 교수뿐만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인 양 ‘표정은 밟게 얼굴엔 미소’를 지니고 살다 그 몇 주 뒤 세상을 떠난 성자였다 회고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로신문》 2023년 2월 22일 「영암교회, 故 우신(牛臣) 황광은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 거행」이란 기사에서도 그런 흔적이 발견된다. 1923년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난 황 목사,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목회한 영암교회에서 고인의 뜻을 기려 기념식을 거행한다. 이때 김형석 교수는 황 목사에 대해 이런 추모사를 남겼다. ‘황 목사는 솔직히 목사님이라기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듯 청소년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나눠준 목자라는 인상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위 두 사례는 1950년 8월 1일 강 교장이 구금되어 순교하던 밤 한얼중학교 사택에서 김 교수와 두려움의 공포로 사선(死線)을 함께 경험했던 김유선 교사, 그리고 그와 결혼한 평북 출신으로 김 교수의 고향 후배인 황 목사와의 인연이 이때까지 이어짐을 알게 한다.


 

한국전쟁 중 서울서 피란와 사선(死線)을 함께 경험한 분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어판 발행인 이춘우 사장과 편집국장 이주운 선생도 계셨다. 이춘우 선생은 동자동에 위치한 조선신학원에 1941년 입학해 1943년 졸업, 1945년 광복 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초대 서무과장으로 재직한 분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춘우와 이주운 선생은 부산 피란길에 나선다.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조선신학원 은사였던 윤인구 부산대학 학장(1953년 11월 초대총장 취임)을 찾아 인사한 후 그들이 피란길에 체류할 곳을 찾아 나선다. 그곳이 김해 진영의 한얼중학교였다. 강 교장은 이들을 흔쾌히 맞았고, 도착 다음 날부터 이주운은 국어, 이춘우는 성경을 가르쳤다. 이들은 학교에서 생활하며 교직원들과 공동으로 식사를 해결하는데, 이때 1950년 5월부터 교사로 재직한 김유선과 김성숙, 그리고 조선신학교 출신 이춘실과도 숙식을 함께 하였다. 얼마 후 방학을 맞아 마땅히 갈 곳 없던 이들은 학교에 기거하며 미납수업료 납부 독려차 가정방문을 한다. 수업료는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벼로 받았지만 이도 납부치 못한 학생이 있어 가정을 방문해 독촉한 것이다(이춘우, 『율원록』, 79).

 
그러던 중 1950년 8월 1일 진영지서장이 강 교장을 구금했는데, 그다음 날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두려움의 공포로 떨고 있을 즈음 강 교장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사모(오중은)에게 함께 피신하자며 설득했지만 사모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여선생 3명(김유선, 김성숙, 이춘실)이 먼저 떠나고, 이춘우 선생은 한얼중학교 녹산분교를 찾았지만 그곳도 여의치 않아 부산으로 내려가 피란 생활을 한다. 이춘우와 이주운 선생이 한얼중학교에서 피란 생활을 한시기는 1950년 7월부터 8월 초순으로 보인다. 이들이 학생을 가르치며 생활한 여름 내내 흙벽돌 교사(校舍)는 비만 오면 빗물이 스며들고 허물어져 다시 쌓는 일을 반복하는데, 강 교장이 세운 흙벽돌 교사(校舍)에 대한 생생한 현장 증언이라 이를 담아 본다.


“흙벽돌로 지어진 교사 지붕은 얇은 초가로 덮여 있는 데다 비만 왔다 하면 물이 벽으로 스며들어 부분적으로 또는 아주 폭삭 무너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나중에는 워낙 자주 그러니까 당연한 일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또 책상은 널빤지로 되어있어 그런대로 쓸만했지만 의자는 흙을 붙여 만든 잔디로 된 뗏장을 쌓아 놓은 것이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지낸 시간은 한여름이었으니 여름 내내 무너지고 다시 쌓는 일을 반복했다(이춘우, 『율원록』,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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