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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립에 관한 이 기록은 자료가 보고된 1921년까지의 역사가 함께 기록된 것이다. 권재학의 집에 모인 성도들은 수가 많아지자 교회당을 준비하였고 3칸 초가를 사서 개조하여 교회당을 마련하였다.
■가음정교회 초기의 직분자들
권재학은 1918년 1월 13일 장로가 되었으나 1940년경 아들 권정수와 함께 다시 북간도로 떠나 이후 돌아오지 못하였다. 권재학 장로의 동생 권재홍은 1939년 장로가 되었으며 아들 권정갑, 손자 권봉길 모두 가음정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김기원과 박기영은 1918년 초대 영수가 되었으며, 김기원의 장남 김종수는 집사로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고 김성은 전 국방장관, 김효은 전 경찰청장이 그의 손자이다. 김기원 영수 역시 1920년경 만주로 갔다가 1933년경 만주에서 소천하였다. 김복식은 1920년 12월 장로로 장립되어 1921년 교회당의 증축 때 많은 수고가 있었으나 그 후 1922년 장로를 사임하였다.
초대 영수이던 박기영은 1929년 장로로 장립되었다가 해방 후 한국교회가 재건될 때 함께 장로가 되었던 김상대와 함께 상남재건교회를 설립하고 떠났다. 교회 설립의 주역의 한 사람인 권종석은 1934년 1월 5일 장로로 장립되어 교회를 섬겼다. 교회 설립자 중 1인인 김순익은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였던지 권재학 장로가 만주로 떠나면서 자신의 소유인 가음정동 산 76-2 임야 990평을 교회에 헌물하면서 그 명의를 김순익으로 하였다가 해방 후에 교회 앞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김순익의 동생인 김상권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해방 후 장로회 총회 총무로 7년간 사역했다. 김순익의 딸 김우선은 권사가 되었으며 외손녀인 김영희, 외증손녀인 박선영도 권사가 되어 모계로 3대권가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창원지역 교회의 산실이 된 가음정교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제의 강압에 움츠려 있던 한국교회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장로회의 경남노회도 노회의 재건을 시작하였으나 일제 앞에서 행한 교회와 성도의 신사참배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측(고려파와 재건파)과 형식적인 절차로 마무리하려는 장로회 다수가 부딪혀 점차 분열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음정교회 역시 그 부분을 피할 수 없었다. 출옥성도인 최덕지가 신사참배를 한 교회와 교역자, 성도들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를 부르짖고 심지어 신사참배를 한 교회당을 불살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 여러 교회에서 실행하였는데 이들을 재건파라 불렀다. 가음정교회의 일부도 그러한 최덕지의 주장이 옳다고 보고 1948년경 재건파의 주장에 동조하여 박기영, 김상대 두 장로를 중심으로 상당수 교인이 떠나 상남재건교회가 분리되었다.
1951년 11월 진해교회가 피난민으로 일시 부흥되자 가음정교회의 성주기도소에 속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개척의 명분으로 성주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진해교회에서 고려파인 제일진해교회가 분립되어 나가자 개척한 성주교회를 돌보지 못하여 가음정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후원하였다. 또 하나의 분리는 1951년 10월 상남기도소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교인들이 교회를 세웠고 1956년 남면교회라 이름하다가 1981년 세광교회로 교회 명칭을 바꾸었다. 또 1952년 6월 가음정교회의 안갑석, 허달막, 안교복 집사 등은 경남(법통)노회를 반대하고 교회를 분립하여 상남교회를 세웠다. 또 1970년대 초에는 정동기도소가 정동교회로 분립되었다. 결국 가음정교회에서 짧은 기간에 5개의 교회가 분립하여 6개 교회가 되어 모두 작고 어려운 교회였으나 창원이 공업도시로 변모하면서 모두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 모든 것은 창원이 대도시가 될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준비하신 것으로 믿고 있다.
■가음정교회를 섬긴 목회자, 가음정교회 출신의 목회자
지난 120년 동안 수많은 목회자가 사역하였다. 다만 교회설립 때부터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룰 때까지 전임사역자가 없었으므로 때로는 단기간을 사역하기도 하였으나 지역을 대표하고 때로는 한국교회사에도 족적이 뚜렷한 목회자가 당회장을 맡아 교회를 인도하였다.
대표적으로 심익순(Water. E. Smith 沈翊舜), 김기원(1920. 2. - 1923. 1.), 맹호은(孟晧恩, Rev. FJ. Macrae, 1916, 1926. 하반기), 이약신(1945-1946., 1949. 11. - 1952. 8.), 이금도(1962. - 1967. 5.), 손명복(1976. - 1977. 2.)이다.
반면 가음정교회 출신의 목회자는 위 김상권 목사 외에 합동측 미주 총회장을 지낸 김월조 목사, 고려시학교장을 지낸 강유중 박사가 있으며 모두 30명 정도의 목회자를 배출하였다.
가음정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한 것은 1977년 3월 23일 주종근 목사를 청빙하면서이다. 이미 주종근 목사는 1975년 4월 7일 전도사로 부임하여 가음정교회에서 강도사가 되었으며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담임목사로 1981년 8월 30일까지 시무하였다. 그리고 1981. 10. 김태빈 목사가 부임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1984. 7. 사임하였다.
가음정교회를 오늘과 같은 반석 위에 세운 공로자는 강영식 목사이다. 강영식 목사는 1984년 12월 27일 부임하였다. 당시 교회가 건축 부채로 인하여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에 따라 교인들 일부가 떠나 어수선할 때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안정시켰다. 강영식 목사는 24년을 시무하고 2010년 2월 원로목사로 추대받으며 은퇴하였으며 은퇴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캄보디아 선교사로 자원하여 현재까지 선교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강영식 목사의 사역은 아래에서 계속 살펴볼 수 있다.
제인호 목사는 가음정교회에 부임한 뒤 세계에서 가장 큰 크리스챤 대학인 미국 LIBERTY UNIVERSITY의 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한 이듬해에 사실상 목회를 이양받아 사역하였다. 제인호 목사의 설교는 젊은 성도들의 지성을 채웠으며 폭넓은 지식과 리더십은 교회를 이끌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인호 목사의 부임 후 가장 큰 과제는 도시재개발로 인한 교회당의 건축이었다. 본당과 비전센터(교육관) 두 개의 건물은 앞으로 가음정교회가 발전해 갈 수 있는 물적(物的) 바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인호 목사의 목회 열매는 가음정진해교회의 분립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당의 건축 부채가 남아 있음에도 교회설립 120년을 기념하는 기념교회로 교회의 분립개척을 계획하여 2026년 6월 7일 가음정진해교회 설립 예배를 은혜 가운데 드렸다.
안타까우면서 감사한 것은 2003년 7월 부임하여 가음정진해교회의 교회당 건축이 마무리될 즈음인 2025년 10월 제인호 목사는 고신총회의 사무총장으로 부름을 받았고 후임으로 최종혁 목사가 부임하였다. 가음정교회는 이미 변화하는 주변 사회의 패러다임에 대처하기 위한 큰 비전의 리더십을 위하여 제인호 목사를 고신총회에 파송한 것과 같은 결과를 얻었고, 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최종혁 목사를 후임으로 청빙하여 온 성도들과 함께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