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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거제도 사역··· 분양할 젖양 호주서 싣고 와

크리스천리뷰 김석원 객원 기자 입력 2026.08.10 12:18 수정 2026.08.10 12:18

[특집] 한국 복음화의 씨앗 - 故 변조은 목사

1953~1954년 한국 선교 1호 지원
1962년 통합 마산교회 소속 사역
호주선교부, 당시 신사참배 반대
사회정의 학생들에게 많이 배워

본지는 현재 생존하는 호주 선교사들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그들의 한국 사역을 소개하고, 한국과 호주를 이어주는 영적 유산을 호주 한인 독자들에게 전해 왔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의 한국사역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기억을 정리하여 이후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유산을 검토할 필요도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한국사역의 배경, 내용, 그리고 유산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은 지면 관계로 편집을 거쳤지만, 내용은 육성으로 녹음된 내용에 충실했다. 바라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 호주장로교의 한국선교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역사적 계승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인터뷰 대상으로 변조은 목사(Rev. Dr. John P. Brown, 1960-1972 사역)와 함께 했다. (편집자 주)
거제도 농촌 사람들에게 돼지와 젖양을 분양해 주기 위해 젖양을 배에 싣고 있는 변조은 목사. 이 사진은 멜본에서 발행되는 The Age에 보도됐다.
거제도 농촌 사람들에게 돼지와 젖양을 분양해 주기 위해 젖양을 배에 싣고 있는 변조은 목사. 이 사진은 멜본에서 발행되는 The Age에 보도됐다.
미소 짓고 있는 변조은 목사
미소 짓고 있는 변조은 목사
■ 성장배경과 신앙

 부모님은 스코틀랜드 가난한 하이랜드 지방 출신으로 이민 와서 사우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정착했다. 한 열 명쯤 다니던 지역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 다행히도 장학금을 받고 헤밀톤 하이스쿨을 4년 공부하고 졸업했다. 누나가 그곳 우체국에 취직해서 자신의 작은 보수를 갈라 하숙비를 내줘서 공부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굉장히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헤밀톤 학교 내 크리스찬 클럽이 있어서 서기로 열심히 일했다. 대부분 학생들은 교회를 다녔고 15살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 어렵게 들어간 멜본대에서 중동어를 전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로선 드문 일 같은데? 또 이후 신학교로 간 이유는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했는데, 학생이 나와 다른 아랍계 학생 둘밖에 없어서 거의 오후마다 교수실에 가서 개인교습을 받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언어를 좋아해서 시작했다. 당시 신학교육은 사역후보생으로 일반학부에 위탁되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멜본대학에서의 공부는 오몬드신학교의 위탁학생격이었다. 원래 나는 의대 지망생이었는데, 12학년 때 아버지가 몹시 아파서 농장 경영을 해야 해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졸업하고 대학교를 갈 수 있었다.

■ 아내 노마 목사를 만난 곳이 멜본대학교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어떤 기록에는 노마 목사가 먼저 한국선교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선교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노마와는 입학하는 그날, 기독교학생회 모임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 만났다. 모임은 EU의 총무 역할을 했다.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EU입장에서 탈피(outgrown)하게 되었다. 아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고 1952년 대학 입학 때, 당시 한국전쟁으로 한국전 피난민 사진과 기사가 많이 멜본 언론에 나왔다.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의 일신병원사역을 세우는 과정이 장로교신문을 통해서 거의 매주 접할 수 있었다. 멜본대학을 다니는 동안 1953~1954년에 처음으로 한국 선교사역을 지원했다. 아마 내가 1호로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그 후 선교사로 바로 나가지 않고 일반 목회를 하셨는데, 하신 일과 결국 한국선교사로 가게 된 과정
 멜본대와 오먼드신학교(당시 빅토리아주장로교신학대학)를 졸업 후, 빅토리아주 서부 깁슬랜드지역, 번스데일교회 부목사에서 일하면서, 두 노회에서 기독교 교육을 담당했다. 주로 청년들을 담당했고 아동과 교사도 교육했다. 그러다 한국선교를 지원한지 6~7년이나 지난 상황에서, 갑자기 선교부에서 어떻게 할지를 묻는 전보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그날이 번스데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는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한국선교사로 결정하고 나갔다. 선교훈련은 지금은 사라진 올세인트 바이블칼리지에서 받았는데, 하버필드에서 세교단(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이 1958~1959년쯤 세워 성공적으로 운영한 학교였다. 우리는 급했기 때문에 6주만 공부를 했고, 나는 일 년을 교육받고 바로 나갔다.

■ 빅토리아주 장로교회가 해방 후에는 한국선교사로 나간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변 목사께서 지원할 때 알고 있던 한국선교 상황은
 원래 호주선교부는 1920년대부터 세계대전으로 여러 가지 상황이 어려웠다. 일차세계대전으로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나가서 호주 전체가 경제난이 왔고, 선교부도 인력이나 선교사 보낼 돈도 항상 부족했다고 회의록에 나온다. 그때 선교사가 30명 정도였고, 재한선교사들의 형제자매 중에서만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해방되었을 때 선교사들이 당장 들어갔어야 했는데, 1945년부터 50년까지는 6명밖에 나가지 못했다. 남자 셋(나예인, 안대손, 권임함)과 여자 셋이 전부였다. 그때 경남부산노회에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때 선교사를 보내지 못해, 당시 미국계 보수적인 장로교 단체들이 그 공백을 채웠다.
 이들은 자유신학과 근본주의의 싸움 중에서 자라나 근본주의신학을 가지고 전도와 사역을 했고, 이전 호주에서 보낸 장로교 선교사들이 가졌던 주류 신학과는 많이 달랐다. 호주장로교 선교사들은 근본주의적 신학출신은 거의 없었다.

 


■ 1945년 빅토리아주 총회에서 신사참배로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특별기도시간이 있었다고 나오고, 일제 말에도 신사참배에 가장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이 호주장로교회였는데, 해방 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철저한 회개보다는 덮고 가자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에 따른 분열(고신)도 있었는데, 호주선교사로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1942년까지 호주선교부는 철저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때문에 수감된 호주 선교사도 있었다. 그런데 1950년쯤 한국에 있었던 호주 선교사 앤더슨과 커닝햄, 레인 목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아직 교회가 갈라지기 전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갈라진 상태였고, (고신파)이들이 너무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다는 비난이 많았다.
 당시 더 복잡하게 된 것은 미국계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와서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이들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 호주 선교사들은 곤란한 입장이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주로 고신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들이 고신에 많이 갔기 때문이다. 당시 재한 호주 선교사들은 이들이 너무 교만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마음은 많이 아팠다.


■ 1959년 중앙선교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미국북장로회를 중심으로 선교에 대한 모든 결정을 한국교회가 하도록 결정했지만, 교단 분열로 집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교단 분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던 간에 이후 모든 지원이 주로 통합측으로 쏠렸는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는지
 내가 한국에 도착한 1960년에는 이미 합동은 나눠졌다. (그 배경으로) 호주장로교단은 원래 세계교회협의회 회원이었는데, 미국에서 맥킨타이어의 주도로 보수기독교단체들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용공으로 몰 때 거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WCC에서 7년간 중앙위원으로 일했지만 공산당은 결코 아닌 주류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반대측의 공격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왔을 때는 다른 선택권은 없었고, 내가 상대할 수 있는 교회는 통합측밖에 없었다. 바로 통합측 마산노회의 노회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마산 제2문창교회 같은 고신교회들과는 강단교류도 하고 친하게 지냈다. 특히 지방에 다니면 당시에는 합동교회는 별로 없었고, 고신교회들과는 별다른 갈등 없이 잘 지냈다. 당시 한국 내 호주선교부 대표는 따로 없었다. 매혜영, 매혜영 자매와 맥비나 등이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미 자리했던 스튜어트, 헤이즐딘 목사가 어른 역할을 했지만 한국교회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당시 온 선교사들을) 잘 지도해 줄 분이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 시 한국선교는 주로 빅토리아주에서 하던 것이 연방으로 이관되었는데, 한국선교의 후원배경이나 선교사 출신지가 넓혀졌는지? 변 목사의 스폰서는?
 1946년에 연방선교부로 이관됐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주로 지원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에 나왔다. 내 지원은 선교부 자체가 책임졌다. 그러나 실은 내 봉급을 10년간 멜본이 아니라 시드니 시내 맥콰리 스트리트의 세인트 스테판교회가 혼자 지원했다.
 특별한 경우였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한국교회처럼은 아니고 선교부를 거쳐서 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매달 선교편지를 보냈다. 그 교회는 1958년부터 빅토리아주 선교 총무를 사임하고 연방 선교 총무로 이임한 서덕기 목사에게 안수를 받은 목사가 사역하던 곳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지원교회들이 빅토리아주 밖에서도 있었는데 내가 간 그해도 이미 퀸슬랜드에서 나간 분이 한 분 있었고, 내 이후에도 3명이 있었는데, 이중 안덕희 목사는 퀸슬랜드 출신이지만 멜본 롤랜드여성신학교에서 교육받았다. 뉴사우스웨일즈주 출신은 구의두 목사가 있었다. 당시 뉴사우스웨일즈주는 내부적으로 신학적 갈등 때문에 보수-진보로 내부적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에 반해 멜본은 주류중심으로 그런 분리가 없어서(선교참여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 서울에서 언어훈련을 마치고 1962년 통합측 마산노회소속으로 거제도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당시 농촌교회의 사역과 재정상태는
 당시 농촌교회는 너무 약했다. 거제도 전체에 2명의 목사밖에 없었고 전도사나 장로들이 설교를 해야 해서, 나는 이들 교회의 (순회)당회장 역할과 매월 평신도 설교자들을 모아 하루 동안 준비시켜 주었다.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변조은 목사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변조은 목사

■ 마산노회에서는 이외에 다른 어떤 역할을 했나? 노마 사모도 전쟁 미망인을 돕는 사역을 하셨다는데. 당시 경제적으로나 교단 분립 등으로 어려웠던 당시 농촌 사역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건은
 그 외에는 성경학교(이후 부산장신대로 발전)에서 가르쳤다. 농가에서 자란 배경 때문에 농촌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돼지나 염소를 나눠주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과부들이 만든 물건을 호주로 보내어 5~6년 동안 팔았다.
 한 번은 시드니에서 부산에서 왔다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1963년 소랑교회에서 나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더라. 당시 나는 거제읍에서 15리쯤 떨어진 소랑교회에서 일하기 위해서 온 가족들과 함께 사랑방 하나를 빌려 전도와 교육을 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50년 만에 다시 만났던 것이다.


■ 서구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 오는 것만도 큰 희생이지만, 선교현지에서 서구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사는 경우도 많았다. 변 목사님은 서울도 아니고 더 낙후된 도서지방의 지역민과 같이 생활하신 것 같은데, 그때부터 사회의식이 강했나?
 다른 선교사도 많이 그랬던 것 같은데, 선교하려면 현지인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거제도 사람들도 (내가 가면) 조그만 생선이나 계란이라도 대접해주었다. 농부 가족들에게 (분양해 준) 돼지가 잘 크느냐 물으면, 이미 처분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빚이 너무 버거워서 그랬다. 나는 그들 덕분에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당시 사역에 대한 이전 기록을 보면, 1966년 농민들에게 가축을 분양하기 위해 호주에서 직접 가축과 함께 배를 타고 한국까지 수송을 하는 열성을 보였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적은 내용이 있다
 아니다. 당시 젖을 짜는 양을 나눠주는 일은 잘 안됐지만, 돼지는 잘됐다. 재래종과 교배해서 잘 자라는 돼지가 생겼다.


■ 1964년 광나루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히브리어, 구약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기록에는 처음으로 호주장로교에 신학교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한 교단은 기독교장로회(나에게는 이런 초청은 전혀 없었고 나의 선배인 권임함 목사가 1940년대에 이런 초청을 받았다)로 나오는데 장신 쪽으로 간 까닭은? 당시 필드선교사가 매우 적어 이런 결정은 쉽지 않았을텐데 호주장로교 교단선교정책에 변화가 있었나?
 전쟁 전 커닝햄 선교사(Rev. Frank W. Cunningham, 한국명 권임함)를 통해 호주 선교부로 한신(조선신학교)의 공식초청이 있었지만 논의만 하고 그것으로 끝났다. 마산 노회에서는 당시 일 년에 두어 번씩 찾아가 예식을 거행해주는 당회장 역할이 큰 도움이 되는지 논란이 있었다. 나는 한인 목사님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느꼈다.
 당시 호주장로교 선교부정책이 변화가 있어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신 교수직을 하면서 총회일을 많이 했다. 3개 선교부의 모든 사업을 총회 아래 두며 이뤄졌던 협동사업부 한완석 총무, 내가 영어 담당으로 같이 일을 많이 했다(1969~1972년).


■ 도시산업 선교회 - 당시 호주장로교의 선교에 대해 도시산업를 많이들 떠올린다. 그러나 원래 도시산업선교는 1957년 루브랙 선교사가 총회 내 산업전도위원회를 만들고, 화이트 선교사가 연대 안에 도시산업선교에 대한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출발됐다. 변 목사님은 언제부터 관련되었나?
 마산에서 있을 때, 공장을 경영하는 장로님이 직원들에게 설교를 부탁해서 관계를 했을 뿐이지, 도시산업선교는 서울에 와서 학생들을 통해 배웠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우튼 목사(Rev. Richard F. Wootton, 한국명 우택인)가 영등포의 조지성 목사와 3년간 일하기 시작했고 나에게도 소개해 주었다.
 1968년부터는 가르치던 학생 중에 인명진, 김진홍, 홍길복 목사처럼 산업선교와 도시선교로 이미 사역하는 분들이 있었다. 당시 내가 가르치던 예언서를 보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의 입에서 교회예식보다는 사회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때는 김진홍 목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 알아보면 경찰서에 있다고 해서, (교수로서) 나 역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교실에서 현실적인 사회정의를 다룰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생들에게서 많이 배운 셈이다.


■ 당시 한국교회 주류는 사회정의에 대해 무관심했는데, 이를 강조하던 교수로서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별로 없었고, 학교나 총회가 나를 잘 봐주었다. 보수적인 김석찬 목사의 문창교회에서는 성경해석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지만 그 외는 갈등이 별로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인명진 목사를 많이 도와준 교회가 바로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였다. 무관심한 것 같아도, 그런 어른들이 있어서 힘을 얻었다. 그 외에도 몇몇 교회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재한 주요선교부의 통합체였던 협동사업부의 영문서기로서 활동하셨다. 당시 한국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지만, 1952년 천만인전도운동,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 1973~4년 익스플로어 집회(빌 브라이트), 1984년 개신교선교 백주년 행사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외적성장 드라이브로 몰아가며 사회정의의식이 많이 약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교회와의 관계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학교와 총회에서 잘 배려해줘 별 문제는 없었다. 총회 총무였던 김윤식 목사나 한완석 목사는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나와는 친했다. 나는 한국교회 성장주의에는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성경 중심으로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언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는데 환영은 안해도,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준공감사예배 및 제막식에 참석한 변조은 목사 부부
순직 호주 선교사 묘원 준공감사예배 및 제막식에 참석한 변조은 목사 부부

■ 호주장로교 에큐메니컬운동이 활발해졌을 때, 한신을 제외한 다른 장로교 총회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에큐메니컬운동에 반대하던 합동 측과 결별 뒤 통합 역시 60년대 말이나 복귀가 재개된다. 61년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세워진 연세대 연합신학원 쪽으로 가지 않고 통합쪽 교단학교에서 같이 일하게 된 이유는
 이미 한신이 나갈 때 통합과 나갈 것을 결정을 해서, (호주장로교선교회 한국 사역 안에서는)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교제하는 분들 중에는 한신측도 있었다. 당시 구약을 가르쳤던 문익환 목사도 그랬는데,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강조했고 내가 많이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한신에 가서 강의를 한 적은 없고, 1960년대 교회가 갈라졌을 때, 통합측도 상처가 있었다. 실제로 통합 안에서도 미국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주류였는데 이를 가지고 의심하거나 시비한 일은 없었다.


■ 1967년 미국장로교 신앙고백이 한국장로교에 소개되었을 때 특히 성경무오론 등을 부정한 태도에 대해 반발이 컸고, 이를 통해 한국기독교의 보수적 성격이 잘 드러났다. 이후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는데, 교수로서 이에 대한 반응은
 사회정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알기에 아무리 성경을 보수적으로 해석해도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성경무오론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경무오설은 미국에서 나온 현상으로, 그것을 신조로 믿는 것보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일에 종사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다.


■ 당시는 이런 문제로 크게 싸우던 상황이었는데, 직접 문제가 된 적은 없었나
 그 문제를 관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당시 키스 R. 크림(Keith R. Crim, 한국명 김기수) 남장로교 선교사가 총회에서 큰 문제(1966년 요나서의 내용이 역사보다는 비유라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논란)가 되었다. 나도 같은 의견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힘든 적이 있었다. 크림 선교사는 유능한 구약학자였는데 한국에서 쫓겨나갔다. 당시에 나는 호주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연관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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