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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은 끝이 아니었다··· 계속된 호주장로교 선교

크리스찬리뷰 김석원 객원기자 기자 입력 2026.08.24 13:11 수정 2026.08.24 13:18

[호주 선교사 특집] - 故 변조은 목사

故 변조은 목사
장학금 전달해 국외 공부 지원
하나님은 가장 가난한 자 도우셔

호주 선교사들 합동 팔순 잔치
한국 지역교회 섬김·교육 등 봉사
일신병원 동문들 한복차림 단장
한국 위해 도움 펼침 감사 표해

한·호 선교 12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강의하는 故 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한·호 선교 12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강의하는 故 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에서나 이후 호주로 돌아와서도 사회참여문제에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셨는데, 막상 한국교회는 매우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특히 목사님이 활동하시던 때는 베트남전이 이슈였고, 한국교회는 베트남전 참전에 열렬히 지지를 보냈다. 목사님은 여기에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내가 호주로 돌아왔을 때 베트남전은 이곳의 핵심 문제였다. 내 친구들에서도 징집 거부자들을 도왔다. 내게 신약을 가르쳤던 데이비드, 맥카티도 자기 집에서 징집 거부자들이 숨을 곳을 제공했다.”

■1972년 귀국 전후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회 재산이 많이 정리됐다. 마산노회 기록은 존 브라운 선교사의 귀국으로 호주 한국 선교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고 평가했는데, 이것이 옳은 평가라고 생각하는지? 이미 한국사역의 주도권을 통합 교단에 넘기신 것으로 아는데.... 그 후에는 한국교회사에서 별다른 호주 선교사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목사님 귀국 후에도 호주장로교 선교회의 한국선교가 어떻게 이어졌다고 보시는지?

“호주선교회 마산지부, 내가 살던 집이었는데 남은 재산을 창신·일신·평신도훈련원에 분배했다. 마산선교지부에 있던 선교사 숙소는 창신학교로 보내고, 부산선교지부 재산은 일신병원에, 진주 재산은 진주노회로 간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귀국함으로 호주장로교 한국 선교가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다. 선교는 세 분야로 계속 이어졌다. 첫째는 일신병원인데, 리더쉽은 넘어갔지만 호주선교부가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둘째는 양지동산, 기술학원, 셋째는 산업선교로 이어졌다. 산업선교는 재작년(2010년)까지 계속해서 청년들을 파송했고 지금까지 24명이 가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군사정권때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넷째는 내가 신학교를 떠난 후에 장학금을 주어서, 여러 (한국 학생들을)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산업선교는 계속 진행됐고, 민주화운동은 후원을 했다기보다는 뒤에서 격려했다. 또한 호주의 교인들이 한국에서 군사정권 아래서 일어나는 탄압 현실을 잘 알려주는 방식으로, 민주화운동을 격려하고 도왔다. 1972년 이후 돌아온 후에 6~8명 정도가 영등포에 가서 일했다.
그리고 1976년 매혜란 선교사, 매혜영 선교사가 10년 후, 85년 안덕희 선교사, 95년 바바라 마틴 선교사가 호주로 돌아왔다. (그렇게 이어졌다는 뜻)”

거제시(거제도) 소량리 마을을 바라보는 故 변조은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거제시(거제도) 소량리 마을을 바라보는 故 변조은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선교를 통해 목사님의 이후 사역에 어떤 영향이 미쳤다고 생각하시는지?

“많은 부분이 있다. 첫째는 농어민의 신앙과 삶이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며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인가도 많이 배웠다.

거제도 녹산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
거제도 녹산으로 가는 정기 여객선

故 변조은 선교사는 배 뒷편에 짚차를 싣고 거제도 선교를 다녔다. /크리스찬리뷰
故 변조은 선교사는 배 뒷편에 짚차를 싣고 거제도 선교를 다녔다. /크리스찬리뷰
■호주선교사들은 복음을 지적인 면보다는 삶이나 실천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런 유산에 비해서는 많이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역사를 읽어보니 도전을 더 많이 받게 된다. 1910년에 한국에 도착한 매혜란, 매혜영 자매의 아버님(Rev. James N. Mackenzie)은 27년 동안 상애원을 경영했다. 벌써 그때부터 선교회의 방향은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인으로서 가장 소외된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9년 매혜란 자매의 어머니(Kelly)는 백정 해방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으로 백정이 교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약자들을 도와줘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나는 한국교회가 실천에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시작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성경의 모든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지도자들에게 많은 한국 교인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모세가 직접 오경을 적었다고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하는 것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이다. 사람들은 치우치기 쉽고, 교회성장운동에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젊은이들이 가득한 큰 교회들을 보며 부러워하지만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80세 생일을 맞은 선교사들에게 일신병원 동문들이 한국식으로 큰 절을 올렸다 /크리스찬리뷰
80세 생일을 맞은 선교사들에게 일신병원 동문들이 한국식으로 큰 절을 올렸다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들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들과 가족들, 선교에 관계했던 인사들, 그리고 멜본에 있는 한ㆍ호 양국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지난 9월 17일 딥딘교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멀리 한국에서 온 일신병원 동문들은 우아한 한복차림으로 축하객들을 맞으며 이날의 잔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으며, 오랜만에 만났기에 반갑게 인사와 정담을 나누다 12시 30분경에 양성대 목사의 사회로 팔순 축하 잔치가 시작되었다.
먼저 80회 생일을 맞은 8명이 누구인지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모두 1933년생으로 80세 생일을 맞았지만, 구의두 목사(Rev. James A. Croft)는 참석하지 못해 7명이 참석했다. 이미 한국 교계에 잘 알려진 분들이지만, 혹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알파벳 순으로 간략히 소개한다.

 

팔순 맞은 호주 선교사들
Rev. Dr. John Brown, 한국명 변조은 (마산(1960-1969) 서울(1969-1972) *12년 사역)
변조은 선교사는 1960년 한국에 도착하여 마산 노회에서 지역교회들을 섬기다가 1964년부터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월요일 밤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화ㆍ수요일 이틀 동안 가르치고 수요일 밤차를 타고 마산으로 내려와 목요일부터 교회들을 섬기는 생활을 5년 동안 했다. 1969년부터 장로회신학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서울로 이사를 했다. 1972년 호주로 귀국하여 호주연합교회 총회에서 교회연합과 선교부서의 책임자로 일하며 한국교회와 호주 내의 한인교회들과 계속하여 관계를 맺고 일했다.지금은 동북 아시아 지역을 섬기는 별빛 재단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Rev. Dr. Andrew Croft, 한국명 구의두 (부산(1958-1959) 마산(1960-1963) *6년 사역)
구의두 선교사는 목사이며 이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1958년 3월 한국에 도착하여 마산에서 교회를 섬기며 마산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부산에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4년 호주로 돌아온 이후 공업화학자로서 일했다.

Dr. Barbara Martin, 한국명 민보은 (부산(1964-1995) *32년 사역)
민보은 선교사는 1964년 1월에 한국으로 갔다. 민보은 선교사는 십대 때에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부르신다는 확신을 가졌다. 일신병원 원장인 헬렌 멕켄지 선교사가 일년 동안 안식년을 갖는 기간에 대신 일을 하려고 갔으나, 일을 하면서 부산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선교지라는 것을 확신하고 32년 동안 일신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서 일했다.
1995년 호주로 돌아와서 말기환자들을 돌보다가 2012년도 9월에 은퇴하였으며, 멜본시내에 있는 콜린스 침례교회를 섬기고 있다.

Ron and Sue Ramm, 론 램과 수 램 (부산(1995-1997) *2년 사역)
론은 퀸스랜드주의 공익 건강 책임자로 일하다 사임한 후 1995년 11월 외국인 치료 담당자로 일신병원에 갔다. 론은 정부의 건강 책임자로 일하며 한국에 가기 전 25년 동안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일신병원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의료 기기들을 배우며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았다. 1년 계약으로 한국에 갔지만, 2년으로 연장해 근무했다. 그의 아내 수는 영어를 가르치고 성경 공부를 인도하며 한국 생활을 바쁘고 즐겁게 보냈으며, 한국인들의 친절에 늘 감사하고 있다. 이들은 1997년 12월 호주로 돌아왔다.

Prof. Dorothy Underwood, 한국명 원성희(부산(1960-1968) 서울(1968-2004) *44년 사역)
원성희 선교사는 1960년 7월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부산지역 한국기독학생총연맹 (KSCF) 협동총무로 봉사했다. 이 일을 하면서 부산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후에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의 음악교수로 일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했으며 졸업 후에는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이화여자대학교 종교음악과 교수로 24년 동안 활동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화여대를 은퇴한 이후 권사로 성가대 지휘자로 있던 새문안교회에서 교회음악 교육과정인 ‘언더우드 기념교회 음악교육원’을 세웠고, 책임자로서 두 번째로 은퇴할 때까지 6년 동안 봉사했다. 2004년 호주로 돌아와 장로로, 교회의회 회장으로, 성가대 지휘자로, 그리고 노회 및 지역사회의 봉사 기관에서 섬기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Dick & Betty Wootton, 한국명 우택인ㆍ우애진 (서울(1964-1969) *5년 사역)
우택인 선교사는 1964년 서울에 도착하여 공장 노동자들을 돕는 영등포 산업선교부에서 일을 하였고, 광주와 순천에 있는 남장로교 병원에서 결핵환자와 나병환자를 돕는 사역을 했다.
호주로 돌아온 후 호주연합교회 총회에서 선교와 정의 사역 파트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아시아교회협의회(CCA)와 협력하는 일을 하며 독재정권의 타락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였다. 1996년 은퇴한 이후 멜본한인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며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목회적으로 돕는 일을 했다. 우애진 선교사는 조산 간호사로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는 한편 매춘녀들의 재활을 돕는 사역을 담당했다.

지난 해 9월 일신기독병원 개원 60주념 기념식에 민보은, 변조은, 원성희 선교사 그리고 일신병원에서 일했던 몇 분의 선교사들과 함께 필자도 일신병원의 초대를 받아 부산에 다녀온 일이 있다. 이때 이들 세 명의 선교사들은 서로가 동갑이니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시간을 함께 갖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로 민보은 선교사에게 80세 생일을 맞는 분들과 멜본의 호주연합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축하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고, 멜본지역의 목회자들과 만남을 가질 때마다 금년 9월이나 10월 쯤 팔순을 맞는 선교사들을 축하해 주고자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다 지난 4월 말경 화명일신병원의 김정혜 원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일신병원 의사, 간호사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민보은 선교사의 팔순 생일 잔치를 멜본에서 하고 싶지만 자신들이 준비할 수 없으니 도움이 필요하며, 기간은 추석 연휴 기간에 일신 동문이 오기 쉽다는 것이었다. 그 후 김정혜 원장과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전화로 팔순 잔치를 의논하면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신병원 동문들은 10년 전, 일신병원을 세운 매혜란 (Dr. Helen Mackenzie) 선교사의 90세 생일과 민보은 선교사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멜본에 왔었는데, 일신 동문들은 두 분의 생일을 딥딘교회에서 합동으로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는 두 분 선교사의 가족과 일신 동문들이 모여 행사를 가졌다. 일신병원 동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민보은 선교사의 80세 생일잔치를 10년 전과 같이 민 선교사와 그의 가족, 그리고 일신동문들이 모여 축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보은 선교사는 자신만 축하를 받으면 동료인 변조은, 원성희 선교사에게 미안하다며 세 사람이 함께 잔치를 하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김정혜 원장께 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일신병원 이사장인 인명진 목사도 민보은 선교사의 80세 생일 잔치를 한다면 자신의 스승인 변조은 선교사도 함께 축하해 주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팔순 축하 잔치가 열리게 되었으며, 옛 선교사 동료들도 초대해야 하는 큰 행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정혜 원장은 이번 생일 잔치는 일신 동문들의 손길 만으로는 준비할 수 없는 큰 잔치가 되었으니, 이 잔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민보은 선교사는 마음이 곱고 겸손한 분이다. 이 분과 만나 대화를 할 때마다 느끼는 마음이다. 민보은 선교사는 자신은 일신병원에서 의사로 32년 동안 일을 하였지만 변조은, 원성희 선교사도 일신병원 이사로서 오랫동안 일을 하며 많은 공헌을 한 분들이기에 일신 동문들이 베풀어주는 80세 생일 잔치를 자신만 받는 것은 두 분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합동 팔순 잔치는 민보은, 변조은, 원성희 선교사뿐만 아니라 멜본에 있는 우택인, 우애진 선교사 부부도 함께 초청하여 다섯 명의 팔순 축하 잔치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민보은 선교사가 브리즈번에 있는 론 램, 수 램 부부도 팔순이니 함께 초청하자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여 일곱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에 7명의 합동 팔순 잔치를 한다고 대상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런데 행사 며칠 전에 민보은 선교사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셨던 분들을 다시 확인해 보니 시드니에 있는 구의두 선교사도 80세임을 뒤늦게서야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의두 목사의 이름은 7월에 보낸 초청장에 이름이 빠져있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 되었다.


구의두 목사와 늦게 연락이 되었지만 이 분은 선약이 있어서 합동 팔순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순서지에 구의두 목사의 이름을 적어 인원이 8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단(통합) 총회 기획국장 변창배 목사에게 총회와 관련있는 교회들과 기관들에게 초대장을 보내어 한국에 있는 분들이 오지는 못하지만 행사가 있음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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