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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11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2.12 11:02 수정 2026.02.12 11:02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문학박사, 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현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양재한 장로
양재한 장로
4. 무명(無名)의 도(道), 이규호

2) 세 번의 전환점 

 두 번째는 신학에서 철학으로 전환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규호는 조선신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이때 자신의 삶의 길 개척을 위해 노력했던 신학공부에 점차 흥미를 잃어간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의 너무나도 수치스런 모습, 즉 온갖 저속한 욕심에 의한 분쟁의 터전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보고 목회자의 길 보다는 자신이 나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그는 자신의 실존에 더욱 충실한 구도자의 길을 찾아 나서는데, 그 길이 신학에서 철학으로 전환이다. 규호는 그 길에 대해 ‘인간다운, 너무나도 인간다운’ 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기성종교도 포기하고 나 자신의 실존에 충실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둠 속을 헤쳐가면서 이름 없는 길을 찾으려는 구도자의 정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이규호, ‘인간다운, 너무나도 인간다운’, 144)”
이규호는 1953년 후반기부터 1957년까지 만 4년여 동안 한얼중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 담당교사로 재직하면서 철학공부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기간 이었다고 한다. 그는 1958년 독일 튀빙겐 대학에 입학해 1962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그는 ‘철학은 이미 만들어진 해답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길’로서의 의미를 갖는데, 이를 ‘삶의 철학 = 무명의 도’라 스스로 부르며 그가 철학자로서 일생동안 추구한 삶의 길이 되었다.
세 번째는 철학자와 교수의 길에서 정부공직 참여로의 전환이다. 이규호는 1958년 독일 튀빙겐 대학에 입학해 1962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귀국 후 1963년 중앙대학교 교수, 1964년 연세대학교 교수, 1979년 국토통일원 장관, 1980년 문교부 장관(문교부 장관 재직 중에는 7·30과외금지조치, 대학입학 학력고사 실시, 중고등학생 두발자율화, 교복자율화, 성교육 실시, 졸업정원제 탈락자율화, 고교우열반 편성허용, 대학의 복수지원허용, 사립대학 등록금 자율화 등의 교육정책을 추진하였다. 교육부 장관으로 약 3년6개월을 재임해 역대 최장수 교육부 장관으로 불린다), 1985년 대통령비서실장, 1985년 주일대사, 1988년 외무부 본부대사, 1995년 순신대학교(현 한세대학교) 총장 등 화려한 공직생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철학자와 교수의 길에서 정부공직과 정치에 참여한 이유를 《월간조선》 1994년 5월호에 기고한 ‘한 시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란 글에서 답하고 있다. 그 질문은 1992년 6공화국이 끝날 무렵 가까운 친구가 주관하는 시낭송회의 한 모임에서 젊은 시인으로부터 왜 12·12군사반란과 5·17내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들어가 협력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고, 그는 글로써 답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 질문에 그는 국토통일원 장관, 문교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과 주일대사 등 공직을 맡은 이유를 답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지 못해 보인다.
“1979년 12월 14일 오전으로 기억된다. 통일원장관에 취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 미리 만난 일도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이런 전화 요청에 대한 나의 첫 대답은 내가 어떻게 그런 자리를 맡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문교부는 가끔 드나들었지만 통일원에는 국제정치학자들이 자문이나 전문위원들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마음에 얼른 내키지 않았지만 10·26사건을 새정부가 대의명분에 맞게 처리하고 사심없이 국가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고 협력할 수가 있었다. ...내가 권력의 자리를 원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정계에서 흔히 있다고 하는 뒷거래에 의한 것도 아니고 미리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정치적인 생활에 있어서나 바른 길을 찾으려는 구도자라고 믿고 있다. 세력을 다투는 기성파벌이나 딱딱 굳어서 이데올로기화 한 이름 있는 이념이나 이른바 여론이라는 압력의 대세도 나는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오해받기도 하고 외롭게 소외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늘 나의 길을 찾아서 헤맨다.(이규호, ‘한 시인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왜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4년 5월호, 549)”
그는 2002년 4월 19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기독교인으로 귀의해 신학대학을 졸업했지만 목회자의 길을 걷지 않고 ‘새사람선교회’ 장로로 교회를 섬겼으며, 철학자와 교수에서 정부공직에 참여한 후 은퇴하고 소천할 때 그의 유언에 따라 전재산을 소외계층을 위해 기부하였다. 그가 말하는 ‘무명의 도’란 자신은 학자, 행정가, 교육자로 이름을 얻었지만, 그가 추구한 이상은 명예보다 ‘무명의 길’ 이었다. 즉 신앙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쫓고, 자신의 명예보다 민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의 태도, 이를 철학자 이규호는 ‘무명의 도’라 부르며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음 연재는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⓶김동길 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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