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오피니언/칼럼
선생의 ‘와서 배우라’는 애정어린 권유는 배우지 못한 농촌 아이들에게 희망이자 구원의 메시지였다. 1947년 1학기 복음중등공민학교에 모여든 학생수는 211명이나 되었고, 이들 중에는 20세가 지난 성인 남자 학생들도 많았다. 가난과 무지한 백성들, 부정과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사회와 정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선생에게 가르침을 준 말씀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라는 말씀이었다. 선생은 이 말씀을 붙잡고 죽음을 각오한 자세로 학교를 세워나갔다.
선생은 한얼, 하나의 정신, 큰 정신, 한국의 정신을 가난한 민중의 마음에 심는 것이 가장 확실한 애국의 길이라 믿었기에 가산을 정리해 부인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진영 땅에서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다. 처음 다가온 난관은 배우자는 학생들은 모여드는데 가르칠 교실이 준비되지 않았다. 선생은 진영에 산재한 흙을 이용해 흙벽돌 교실을 세워나갔다. 미숙한 솜씨로 학생들과 함께 찍어 만든 흙벽돌 건물은 여러 번 비에 무너졌지만,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흙벽돌 건물 세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튼튼한 교사를 완공하였다. 아래 사진은 그때 흙벽돌로 세운 한얼중학교 교사(校舍)모습이다.
선생은 흙벽돌 교사(校舍)를 건립하는 과정에 학부모들의 협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셨다. 교장 선생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중노동 한다는 소문을 들은 학부모들, 이들이 자진해서 학교를 찾았고 이들과 함께 학교를 세워나갔다. 그 결과 한얼중학교는 자연스럽게 지역사회학교로 나아가게 된다. 한얼중학교의 하루 시작은 15분 정도 예배로 시작했으며, 직원회의는 교사뿐만 아니라 목수, 미장이도 다 참석해 목수는 목수 선생, 미장이는 미장이 선생이라 불렀고, 교장이나 사환이 같은 월급을 받았다. 식사도 공동취사장에서 만들어 식구 수대로 분배했는데, 학교 설립 당시 70여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공동식사를 했다. 당시 사정이 어려워 소금국이나 된장국에 보리밥을 계속했더니 모두가 영양실조 상태라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것이 우리 농촌의 현실인데 우리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며 항상 식사를 함께하셨다.
그 와중에 학생들과 함께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감나무 한그루씩 심어주었다. 주민들은 그 동기를 의심해 처음에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그동안 정부에서 한 일이 매번 농민을 속이고 빼앗고만 해 그 배후를 일단 의심한 것이다. 이 일은 감나무가 자라 가지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이 나라의 번영을 꿈꾸며 실천한 ‘같이 살기운동’ , 즉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학교운영도 농민을 위한 지역사회학교로 운영했는데, 공부하는 기간은 일반학교와 달리 농번기는 방학에 들어가 농사일을 돕고 농한기는 학교에 모여 집중적으로 학과 공부를 했다. 그런데도 재학생들의 학습수준은 이웃 기존중학교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김동길, ‘같이살기운동의 강성갑 목사’ 169-171)
이런 선생의 교육실천운동은 공산주의자로 내몰리는 빌미가 된다. 선생은 농촌 소도시 진영에서 교육을 통해 농촌사회를 변화 개혁시키고, 그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산해 이 땅을 변화 개혁시키려다 이를 시기한 지역유지들에 의해 수산교 다리 밑에서 순교를 당한다. 이 소식을 접한 연희대학교 총장 원한경 박사는 “연희가 배출한 최고의 인재를 잃었다”고 슬퍼했으며, 선생의 순교 후 후임 교장으로 부임한 조향록 목사는 “한국전쟁으로 가장 큰 손실은 한국교육계가 강성갑을 잃은 것이다. 교육계뿐만 아니라 종교계와 사상계도 그렇다고 믿는다. 진정한 교육은 건물을 남기거나 시간으로서의 역사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꿈과 사상의 씨를 심어 놓고 자기는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분이 강성갑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조향록, ‘스승의 길’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