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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⓶ 김동길 교수 연재 13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3.10 17:01 수정 2026.03.10 17:01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양재한 장로
양재한 장로
2. 강성갑 목사와 만남
학생 김동길이 강성갑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연희대학교 교정에서였다. 김동길 교수가 연희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9년 여름 어느 날 대학강당에서 모인 채플 시간에 조그만 강연회가 있었다. 그 강연회 강사로 강성갑 목사가 온 것이다. 학생 김동길이 본 강성갑 목사의 모습은 크지 않은 키에 얼굴은 거무스레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용모와 체구를 갖춘 중년의 시골 목사로, 형색은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자그마한 눈이 유달리 반짝여서 함부로 대할 위인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성갑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서 입을 여니 세상에 그렇게 똑똑하고 당돌하고 무서운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강성갑 목사는 1948년 1월 26일 미군정청 문교부장 오천석으로부터 한얼중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흙벽돌로 교사(校舍)를 세우며 학생모집과 교육활동 등으로 분주한 일정 중에서도 자신의 교육관을 널리 알리고 함께 실천할 동지들을 찾아 학교 설립인가 다음 해인 1949년 여름 그가 졸업한 연희대학교 강당에서 강연을 한 것이다.
김동길 교수는 강성갑 목사가 연희대학교 교정에서 이때 행한 강연을 ‘같이살기 運動의 姜成甲 목사’란 제목으로 《신동아》 1973년 5월호에 소개하고 있다. 이때 강성갑 목사가 행한 ‘해방공간의 청년학도들이 새나라 건설을 위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강연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은 서울뿐이지 지방은 대한민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중앙의 행정이 얼마나 시골을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대학을 나오고 서울 바닥에 눌러앉아 월급쟁이나 할 생각은 버리고 농촌으로 오시오. 농촌을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은 조국을 움직이게 됩니다. 한 5년이나 10년 딴 생각말고 농촌에 묻혀 농민들을 도우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만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진영읍에 한얼중학교라는 조그마한 학교를 세우고 교장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학교는 흙벽돌로 세운 초라한 교사밖에 없지만 정신은 살아 있고 기백은 뚜렷하여서 오랜 전통을 가졌다는 진영읍내의 공립중학교가 무서워할 정도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였다(김동길, ‘같이 살기運動의 姜成甲 목사’. 169).”
이 강연을 들은 학생 김동길은 강성갑 목사와 함께 시내로 나오면서 궁금한 것에 대한 추가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때 강성갑 목사는 현재 진영에는 일꾼이 필요하니 주저 말고 꼭 와서 같이 일하자고 당부했고, 학생 김동길은 기회를 봐서 꼭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학생 김동길은 1949년 겨울방학 때 ‘대학생봉사대’를 조직해 전공분야별로 영어, 수학, 사회생활 등으로 나누어 한얼중학교로 내려가 40여 일간 임시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동길의 『백년의 사람들, 170』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함께한 학생은 연세대 영문과 이근섭과 김동길, 조선신학교 맹의순과 이규호, 그리고 이화여대 한두 명(우보영, 김유선과 김성숙 등)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김동길과 함께 ‘대학생봉사대’로 참여한 이근섭은 김동길 교수와 평생 우정을 나눈 친구 사이로,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영문학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분이다. 한국전쟁 때는 친구 김동길과 함께 1950년 12월 19일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창경궁에 집결, 장호원과 수안보 등지를 거쳐 부산을 향해 강행군하기도 하였다. 이어 제주도 모슬포의 신병훈련소로 가서 이근섭과 함께 훈련을 받은 삶을 나눈 친구 사이이다.
김동길 교수는 이때 만나고 경험했던 한얼중학교와 강성갑 목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혁신적인 이 학교는 교장과 교직원들의 월급 액수가 같았고 미장이와 목수에게도 선생 자격을 주어 동등한 대우를 했다. 초기엔 취사도 한 곳에서 하며 밥과 국을 집집마다 받아다 먹으면서 철저한 평등사상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이후 그가 ‘빨갱이’로 몰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줄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김동길, 『백년의 사람들』, 175).”
“말로만 복음을 전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로, 행동으로 복음의 진리를 입증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던 강 목사는 ‘나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이 나라의 사환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어떤 권력도 나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말은 허세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이 가지는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김동길, ‘같이 살기運動의 姜成甲 목사’. 170).”
한편, 진영교회 「교회일지」에서도 서울서 내려온 ‘대학생봉사대’에 관한 기록이 발견된다. 1950년 1월 8일 주일예배에 연대학생 찬양, 그다음 주일 1월 15일 이대학생 찬양이란 기록이 나온다. 아마 연대학생 찬양은 김동길과 이근섭, 이대학생 찬양은 우보영, 김성숙과 김유선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강성갑 목사는 진영교회 담임목사와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한얼중학교 교육에 전념할 때로, 진영교회는 강성갑 목사의 친구인 김희도 목사가 후임으로 목회할 때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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