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과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다르다. 우리도 우리의 평가와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는 너무 행복해서 춤을 추었지만, 그것이 미갈의 눈에는 염치없이 보였다.
본문은, 다윗이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가는 장면이다. 다윗은 앞서가며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미갈은 업신여겼다. (16) 그 이유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듯 ]다윗도 몸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20)
다윗이 심하긴 했다. 그 행사에 삼만 명을 동원하고, 온 족속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며 갔고 다윗은 앞에서 춤을 추며 갔는데 그 길이 장장 10km였다. 2시간 30분을 춤을 추며 갔으니 심하긴 좀 심했다. 그만큼 다윗에게 있어서 이 일은 최고의 행사였고 그래서 춤을 추며 갔는데 그것이 미갈의 눈에는 하찮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갈이 본 ‘염치 있는 왕’은 누굴까? 자기 아버지 사울인가? 백성이 두려워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악령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 다니다가 길보아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고, 자기는 목이 잘려 몸은 벽산성벽에 박혀 전시되었다가 머리도 없는 시신으로 장사지내진 사람, 자기가 본 왕의 모습은 이랬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미갈에게 신앙이 있기나 했을까?
반면에 다윗은 어떤 인물이었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전도서 9:11을 보면, [내가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더라 ]고 했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인생을 곁에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일반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유가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없는 모든 것은 헛되니 하나님을 잘 섬겨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라고 그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훌륭함을 따지자면 다윗과 사울이 감히 비교될 일인가? 사울 슬하에서 자란 미갈이 이십 오리를 춤을 추며 갔던 다윗의 마음을 감히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었겠는가? 어디 감히 다윗을 보고 하찮게 여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고전1:18에 보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당시 헬라 철학자 눈에 선한 영적인 존재가 인간을 구하겠다고 악한 물질을 입고 왔다는 말 자체가 미련하게 들렸다. 얕은 세상 철학으로 도무지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유물론에 기반하고 있다. 투쟁해서 이기는 것이 선이고 정의다. 그들의 사고로 볼 때 기독교는 정신병자일 뿐이다. 물질만 아는 그들이 영적인 세계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쾌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동성애에 빠져 살던 그들에게 구원이란 말은 농담으로 들렸다.
오늘날 세상에는 우리를 미혹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무슨 재미로 사는지 그들은 아마 궁금할 것이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생각할 때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난다며 찬송하는 우리의 마음을 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먹고 입고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사는 저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미갈이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듯이, 우리를 세상이 알 리가 없다.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라고 하셨다. 우리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들이 알 수도 없고, 그들이 줄 수도 없는 평안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