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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동행

경남성시화조찬기도회 설교 - 신지균 목사

김미경 기자 입력 2026.04.28 12:28 수정 2026.04.28 15:41

신지균 목사
경남성시화 사무총장
큰나라교회 담임목사

요20:19-20 '샬롬으로 찾아오신 은혜'

서양에서는 부활절 다음 주일을 low sunday라고 합니다.
이것은 침울한 일요일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에 많이 모인 사람들이
그 다음주일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부활주일과 그 다음 주일도 low sunday 분위기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울한 주일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예수님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변화를 예수님은 주신 것일까요?

<1.두려움의 문을 열어서 샬롬의 방으로 바꾸어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 집에 은신해 있었습니다.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찾아갔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왜? 로 시작하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질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대신 샬롬을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싸인 이들에게 꾸지람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칼날 같은 지적이 아니라 감동의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왜" 를 많이 붙이지 마십시오.. 심리학자의 책을 보니까 "왜" 자를 붙이면 관계에 있어서 마음이 닫힌 다고 합니다. 부목사님들 새벽에 빠지면 왜 안나와서가 아니라, 어디 아프냐라고 물을 때 감동받고 목숨걸고 충성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두려움에 갇힌 제자들의 방을 억지로 열고 들어와 왜 숨었느냐고 질타하고, 취조하는 방으로 만들지 않고
조용하게 들어와서 평강의 방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냥 십자가의 아픈 흔적으로 당신의 부활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위로는 도마가 빠진 첫째 부활의 날 저녁이나, 8일 후 도마가 포함된 두 번째 부활의 날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패턴은 같게 나타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26절) 여러분에게 패배와 두려움의 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찾아오시면 혼 날 것 같은 그 방은 결코 더 숨을 곳이 없는 방으로 오픈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의 아픔도, 고통도, 두려움도, 숨길 곳이 되는 예수님을 통해서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방의 문은 잠겨있어도, 그 방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진정한 숨을 곳이 되어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분이 저와 여러분이 샬롬으로서 피할 곳이요 회복과 평강이십니다.

두 번째로 오늘 우리가 만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 힘든 자들에게 자신의 상처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 ! 그냥 주님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너 많이 힘 들구나!” 그냥 그 말씀 한마디면 되는데 ..... 말입니다.

고신대학 다닐 때 채플시간에 남아공 유학을 마치시고 귀국한 정근두 목사님이 눅19장 삭개오 등장 본문으로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라고 하셨는데 그 한 문장에 저는 완전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사랑하시고 찾아가셨듯이 나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채플을 마치고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끔은 잘 짜여 진 설교내용이 아니라 샬롬처럼 말 한 마디에 걸려서 은혜를 받거나 항복하고 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감동은 평강은 그 한 마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픈 흔적과 고통의 옆구리를 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못이 통과한 깊은 상처를 가진 손을.... 날카로운 창끝이 밀고 들어온 옆구리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심하던 도마에게는 그 손을 내밀어 그 상처에 손을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의심을 가시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고, 패배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아픔 상처를 내 미신 것입니다. 누군가에 내 상처를 보인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보임은 그가 가진 모든 자존심도 아픔도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놀라운 일을 만들었습니다.
샬롬을 외치던 음성에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이고 만지도록 할 때, 그들은 기뻐하기도 하고 (20절)도마는 의심에서 믿음으로 돌아서서 신앙고백까지 합니다. (28절) 상처를 통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받은 감동 세가지가 있습니다.

* 하나, 진정한 샬롬은 닫힌 문이 열리는 데 있지 않고 닫혀 있어도 예수님이 그 중심에 찾아오시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 둘, 우리의 상처는 십자가의 상처를 대면할 때 치유된다.
상처 난 사람에게 위로는 내가 가진 상처를 보여줄 때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 1:4)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에 밀고 들어올 때 우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도 네 네 아픔안다"고 한마디만해도 위로됩니다.

* 셋, 기독교는 강함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 강함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기독교는 아픈 손과 옆구리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종교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또한 어떤 변화를 주신 예수님이십니까?

<3.개인에게 맞춤형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두 번째 일요일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도마를 위한 일요일이었습니다. 즉 맞춤형으로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 맞추어서 오신 것입니다. 첫 번째 주일에 없었던 도마는 10명의 동료들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찾아오셨다는 것을 말을 들었을 때, 도마는 그 분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아픈 곳을 굳이 만져봐야겠다는 것입니다. 아픈 곳을 만지면 더 아픈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 다음 일요일에 도마에게 맞는 컨셉으로 “오늘은 너를 위한 주일이다” 라는 식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즉 두번째 주일의 방문은 도마를 위한 주일, 도마 전용주일이었습니다. 주일에 성도들이 자기 전용주일처럼 느낄 때 은혜에 빠집니다. 내 이야기야! 라고 느낄 때 말입니다.

자기 제자가 한 마리 잃은 양처럼 의심으로 그 들판을 헤맬 때 주님은 아픈 상처를 내 밀면서 맞춤형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정과 컨셉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무슨 말로 넋두리를 쏟아내는지 아십니다. 말 한마디까지 놓치지 않고 알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입으로 쏟아내는지 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 내 하나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상처 난 속살을 보여주시며 은혜의 계산법으로 맞춤형으로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시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위로는 선물보따리를 풀어서 주는 것과 새로운 사명으로 전환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4.성령의 선물과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21절에서 평강을 주시고, 보낸다고 하시고 성령님을 받으라고 하시고 23절에 교회적 사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샬롬과 아픈 상처를 보이시며 위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두려움의 방을 스스로 극복하고 나가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성령님을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도전 받습니다.

*하나/문제의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성령님으로 사명 받을 때라는 것이다.
*둘/위로받는 성도로만 살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삶이어야 한다.

부활의 예수님 찾아오셨던 첫 번째 일요일은 침울한 날이 아니라 세가지 즉 평강과 성령님 그리고 사명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매 주일에도 가능한 은혜의 선물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십시오.
주님이 보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무장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적용점 하나를 살펴봄으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결론/적용: 교회/성도는 변해야 합니다>
변화입니다. 부활을 분기점으로, 성경은 “오라는 구약의 구조에서 가라는 구조”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아픈 곳을 찾아가서 평강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맞춤형으로 찾아갔던 것처럼 go 구조로 전환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님으로 사명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실 때 만들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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