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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김동길 교수 연재 16 -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4.29 14:51 수정 2026.04.29 14:51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김동길 교수 연재 15
: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한얼'의 정신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문학박사, 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현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양재한 장로
양재한 장로
4. ‘같이 살기운동’의 강성갑 목사
김동길 교수가 연희대학교 재학시절인 1949년 여름 어느 날 채플시간, 강성갑 목사의 ‘농촌에서 일을 시작해야 장차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강연을 듣고 그해 겨울방학 ‘대학생봉사대’를 조직해 한얼중학교로 내려와 40여 일간 임시교사로 근무한 것은 앞 연재 글에서 언급하였다.


김동길 교수는 이때 그의 경험을 「같이 살기운동의 강성갑 목사; 잊을 수 없는 사람」 이란 제목으로 《신동아》 1973년 5월호에 게제하였다. 강성갑 목사가 해방공간 진영에서 행한 교육실천운동, 김동길 교수는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김동길 교수가 말한 선생의 ‘같이 살기운동’을 논하기 전, 강성갑 목사가 농촌교육운동에 뛰어든 그간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성갑은 창신보통학교와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장유금융조합에서 1932년 1월부터 1937년 2월까지 5년 동안 서기로 근무하셨다. 이때 선생은 우리나라 농촌이 처한 현실을 몸소 체험한 시기였다. 본래 금융조합은 농민을 위한 자조자립조직으로 출발했지만, 그 현실은 일본 제국주의 수탈구조에 예속된 하나의 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우리나라 농촌문제의 본질은 일제의 수탈경제 체제에 있으므로 이를 해결하려면 농민 각자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실력, 즉 문맹의 문제를 해결할 실력을 갖추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해결하고자 장유금융조합 근무시절 친구 김희도(고신총회 21대 총회장 역임)와 함께 무계리교회(현 장유중앙교회)와 관동교회에서 야학을 개설해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농촌교육운동에 눈을 뜬 또 다른 계기는 그의 결혼과도 관련이 있다. 선생의 제적등본에 의하면 1934년 10월 12일 오형선 장로의 장녀 중은과 혼인신고 되어 있다. 오형선 장로는 거창교회를 설립한 분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성도 오윤선 장로의 친동생이다. 오형선 장로는 대한제국 말년인 1899년 황실 재정을 담당한 내장원의 경리담당자로 임용되어 이승만,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 모임에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믿음의 선진 삼형제 이야기, 111).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해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5년 이에 울분한 오형선 장로는 관복을 벗어 던지고 전국을 유랑하며 금광업을 하다 거창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된다. 그 이후 오형선 장로는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셨다. 그가 설립하거나 시무한 교회는 노현리교회(현 웅양교회), 거창읍교회(현 거창교회), 성기리교회(현 성기교회), 방어진교회(현 방어진제일교회), 장승포교회, 대남교회, 상남교회, 운곡교회, 안리교회(현 내동교회), 신반교회, 칠형정교회(현 서상교회), 봉전교회(현 봉평교회), 마상리교회(현 가조교회), 내가천교회(현 가천교회), 함양교회, 원기동교회(현 원기교회), 개평교회, 적화교회(하성교회), 청림교회(대산교회), 합천교회 등 20여 교회나 된다. 오형선 장로는 그가 설립한 교회를 중심으로 밤마다 부녀자와 아동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어 한글과 한국역사를 가르치는 등 애국애족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러시아 말기 지식인들이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민중을 깨우치고자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펼친 ’브나로드 운동(V-narod movement) 등 문맹퇴치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강성갑의 장인 오형선 장로의 이러한 농촌계몽운동은 사위 강성갑의 삶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형선 장로는 해방을 목전에 둔 1944년 4월 11일 69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이러한 항일운동의 공적으로 198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는다(양재한, ‘강성갑 목사의 기독인으로 성장과정과 목회자의 꿈’, 149-158).


강성갑은 장유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농촌의 근본문제를 몸으로 체득했으며, 그리고 오형선 장로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애국애족 농촌계몽운동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그의 꿈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꿈 실현을 위해 당시 모두가 부러워하는 장유금융조합을 사직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1937년 4월 입학해 1941년 3월 졸업하고, 일본 교또에 소재한 동지사대학 신학과에 1941년 입학해 1943년 9월 21일 3년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부산 초량교회 부목사로 목회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살길은 농촌교육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가 과거 근무했던 장유와 가까운 진영교회에 1946년 4월 26일 부임한다. 선생은 청빙위원들이 청빙을 위해 간청하자 ‘그곳에서 농촌운동을 해도 좋습니까’란 말 외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부임 4개월 뒤 1946년 8월 진영 대흥초등학교 가교사를 빌려 복음중등공민학교를 개교했으며, 1946년 9월에는 부산대학교 한글맞춤법 담당 전임교수로 임용된다. 그 이후 1948년 1월 26일 한얼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자 선생이 꿈꾸어 온 농촌교육운동에 온몸을 던지고자 진영교회 담임목사직과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내려놓고 오로지 학교 일에만 전념한다(양재한, ‘강성갑 목사의 목회활동,’ 24-44)..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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