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일 조찬설교
옛적 같게 하옵소서
강석수 목사
경남성시화 고문
마산 낙원교회 원로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예레미야애가5:19~22)
예레미야는 젊을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약 45년간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으며 다섯 왕 재임기에 활동을 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함을 인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지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더 나아가 박해를 받아 투옥되기도 하며 깊은 구덩이에 던짐을 받기도 했으며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배려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시드기야 왕의 두 아들은 처형을 받아 죽었고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예루살렘 성전은 훼파되었고, 성전의 기명들은 바벨론으로 이송이 되었으며, 예루살렘에는 남자 장정은 보이지 않고 여자들과 어린이들만 서성거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애가에는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애가1:1). 이제는 고령자가 되어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은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가5:21)라고 했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였다. 예레미야의 두 기도에서 예레미야 33장 3절의 기도는 널리 알려졌으나 예레미야애가 5장 21절의 기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 생각하는 말씀의 제목은 예레미야의 기도 중에 ‘옛적 같게 하옵소서’ 란 말씀이다. 어떠한 의미인가?
첫째, 유다와 이스라엘이 폭망하게 된 원인 옛적 같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유다 사람들이 일찍부터 옛적 같이 했더라면 폭망하지 않았다. 유다의 폭망은 일조일석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100년 전 이사야 때부터 있었던 결과이다.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 보다 더 악했는데, 하나님은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보다 악하다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경위를 알고 있으면서 대비치 못했기 때문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패망자가 원인을 모를 수는 있으나 원인은 반드시 있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요, 심은 대로 거두는 추수의 원리이다. 추수의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콩을 심으면 콩을,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며, 적게 심으면 적게,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며, 때가 되면 거두게 된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마태 7:15~20, 갈라디아서6:7~8). 남 유다 폭망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옛적 같이 못한 유다에 있을 뿐이다.
둘째, 옛적 같이 하는 것은 어떠한 폭망에라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며 방법이고 묘책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들이 많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이 폭망하게 되었으나 바로왕과 애굽군이, 아말렉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폭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군대와 모세나 아론과 훌이 이겼고, 엘리야가 폭망한 것 같으나 바알과 아세라 목사 선지자들이 폭망했으며,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폭망한 줄 알았는데 하만이 폭망했으며, 다니엘이 폭망하지 않고 다니엘을 시기했던 무리들이 폭망했다. 사랑샘 공동체에 이런 글귀를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현재 당신의 모습은 과거에 잘못된 선택의 결과이며, 미래 당신의 모습은 현재 선택의 결과이다.’
셋째, 우리가 옛적 같이 하자고 한다.
예레미야 선지지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일곱 번 사용하고 있다. 예레미야애가 5장에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무려 25차례 쓰고 있다. 왜 예레미야는 ‘너’, ‘너희들’ 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쓰고 있을까. ‘우리’라는 말에는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너’, ‘너희들’ 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라고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이자. 부모와 같은 높은 마음, 넓은 마음,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이다. 예레미야의 ‘우리’ 개념 운동을 함께 꿈꾸었으면 한다.
‘옛적 같게 하옵소서’를 확대해 보면 좋겠다. 영국의 교회가 옛적 같이 되었으면 하며, 독일과 호주와 캐나다, 미국의 교회가 우리도 옛적 같이 되었으며, 한국교회가 남과 북 교회가, 동과 서 교회가 옛적 같이 되었으면 한다. 호·영남 (동·서 교회) 한마음 성시화 대회가 17회를 계속되고 있는 현상은 좋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석연치 못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선거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동 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 서 교회가 국민 앞에서도 하나되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