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칼럼

황제와 대결했던 암브로시우스 - 이상규 교수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4:12 수정 2026.01.15 14:12

황제와 대결했던 암브로시우스
이상규 교수
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

교회 지도자가 권력자와 대결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나 독재자 혹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권력자를 반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로마 황제들과 대결하면서 당당하게 기독교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4세기의 인물, 밀라노의 감독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 c. 334/349 –397)였다. 그는 헬라 교부 크리소스토모스(349-407)와 함께 당대 최고의 설교자로 언급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354-430), 히에로니무스(제롬, 347-420), 그레고리우스(540-604)와 더불어 라틴교회 4대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위해 싸웠고, 기독교적 가치 실현을 위해 설교하고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데오도시우스1세와 싸웠고, 그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사과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흔적 몇 가지를 추적해 볼까 한다. 첫째, 암브로시우스는 그라티아누스(Flavius Gratianus, 375-383) 황제를 설득하여 서유럽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도록 법안을 제정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다. 그런데 법안을 제정하기 전 그라티아누스가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335–388, 재임 383-388)에 의해 전장에서 피살당함으로서 법안 제정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정통교리 수호를 위해 싸운 것이다. 막시무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황제에 의해 처형된다. 둘째,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 세워진 ‘승리의 여신상’을 382~383년 겨울에 철거하게 한 일이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신이 안겨준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신상의 철거를 주장한 것이다. 그후 ‘정의의 여신상’을 다시 세우려는 로마시 집정관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Q. Aurelius Symmachus, 345-402)의 시도를 반대하고, 설교를 통해 이를 비판했다. 신상 거부만이 아니라 이교도 예식을 제거하도록 한 이가 암브로시우스였다. 셋째, 그라치아누스 황제가 죽자 이복동생 발레티아누스 2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가 섭정했다. 그런데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던 유스티나는 385년과 386년 부활절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암브로시우스가 관리하던 밀라노의 바실리카 포르치아나 대성당을 아리우스파에게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이런 요구는 부당하다고 보아 이에 대항하여 설교하고 유스티나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때 암브로시우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암브로시우스의 이때의 설교는 필사되어 후대로 전해지고 오늘까지 소중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암브로시우스가 양도를 거부하자 황제가 무력을 동원하여 성당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했다. 이때 암브로시우스는 신도들과 함께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며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지켰다. 성도들은 성당을 떠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버텼다고 한다. 넷째, 암브로시우스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해서도 부당한 일을 비판하고 신교와 기독교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 347-395년, 재임 379-395)와 대결한 것이다. 데살로니카 주민들이 390년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집어넣고 모욕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보내 그 지방에 사는 약 7천 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부당한 저항일 수 있으나 7천 명의 주민을 학살한 일은 전례가 없는 제노사이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황제에게 서한을 보냈다. “폐하,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찬 예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수찬 정지를 명한 것이다. 데살로니가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아울러 당분간 교회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요청을 묵살한 황제는 부활주일 측근들을 대동하고 로마교회로 행차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교회당에 못 들어오게 막았다. 단호한 태도에 놀란 황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고, 390년 성탄절 날에 다시 교회로 찾아왔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제지하며 그에게 데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단호한 태도를 본 황제는 결국 감독의 요구에 굴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했다. 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8개월이 지난 때였다. 암브로시우스는 8개월동안 황제의 불의를 지적하고 설교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397년 4월4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네 사람의 로마황제를 상대했는데, 기독교 가치 실현을 위해 설교했고, 가르쳤으며, 세상의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그는 존경받은 기독교 지도자 그리고 설교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저작권자 크리스천경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