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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5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4:14 수정 2026.01.15 14:15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5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문학박사, 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현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2. 한국전쟁 시절 맹의순과 이규호

3) 헤어진 후: 맹의순
피란길에 함께 나선 다섯 명은 충북 괴산 부근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심한 매질과 심문을 당한 후 이규호 일행 3명은 풀려났지만, 맹의순과 한용택은 북한에서 내려온 반동분자라 하여 풀려나지 못하고 구금, 매질과 심문을 더 당한 후 20여일 후에 풀려난다. 풀려난 이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왜관 부근에 다다랐을 때 미군에 붙잡히는 데, 이제야 살았다는 기대와 안도감과는 달리 맹의순 일행은 전쟁포로로 붙잡힌다. 무엇보다 맹의순은 영어도 잘하고, 가방에서 영어 원문서적(신학)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인민군의 첩자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날이 1950년 9월 15일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후방군이 일제히 북상한 날이었다. 당시 미8군은 낙동강 전선 위에서 붙잡은 사람들은 모조리 포로로 간주하였고, 맹의순은 민간인이자 피란민임에도 억울하게 전쟁포로가 된다. 맹의순은 그 다음날인 1950년 9월 16일부터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삶을 마감할 때인 1952년 8월 11일까지 약 23개월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 땅에서 26년8개월을 살다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꽃다운 생을 마감하였다.
맹의순이 포로생활을 한 23개월 중 1952년 1월 1일부터 3월 26일까지 약 3개월 동안이나마 그의 일기가 남아 있다. 이 일기를 통해서 맹의순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 일기는 홍성사에서 2017년 『십자가의 길』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김시규의 석사학위논문에서도 「‘전쟁포로’ 맹의순이 기록한 ‘일기’에 나타난 그의 ‘목회’」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내용은 ‘제3장 십자가의 길, 맹의순’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한 증언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맹의순의 포로수용소에서 삶을 들여다본다.
한용택은 남대문교회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맹의순의 신앙지도를 받았으며, 맹의순과 피란부터 시작하여 포로생활까지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운 맹의순의 제자이다. 포로석방 후 맹의순이 다녔던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해 서울 반석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한용택은 피란길에서 맹의순이 보여준 헌신과 사랑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함께 피란하는 동안, 늘 식사준비 등 궂은일은 도맡아 하면서, 함께하는 우리를 돌보고 보호하려했습니다. 또한 피란 도중에 너무 꽉 끼는 신발 때문에 제 발이 통통 붓고 물집이 심하게 잡혀서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다른 사람들의 피란길에도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나를 두고 먼저 가라고 이야기했지만 맹 선생님은 단호하게 함께 가야한다면서 피란길 속도가 많이 지체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데리고 갔습니다”.
이희원은 학창시절 남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중등부 교사로 섬기던 맹의순을 처음 만났다. 그는 서울의 어느 미국 전화회사에 취직해 있던 중 한국전쟁이 시작되었고,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지만 이번에는 국군에게 붙잡혀 전쟁포로가 되어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맹의순을 다시 만나게 된다. 맹의순은 이희원에게 포로수용소 내 교회 개척의 뜻을 설명하고 함께 교회를 세우자고 제안한다. 다음은 광야교회에 대한 이희원의 증언이다. “제4수용소 미군에게 부탁하여 야전용 큰 천막 2동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름은 광야교회로 하고 주일 낮 예배와 저녁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때 광야교회에 참석한 교인수는 약 100-200명이고 매주일 교인과 새신자가 늘어났습니다. 주일날과 저녁집회 때 설교는 주로 맹의순 선생이 하셨습니다”.
문명철은 만주 훈춘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웅기에서 자랐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의 강제징집을 피해 남쪽으로 피란길에 나섰다. 문명철은 1950년 11월 5일 원산을 향해 가던 중 유엔군에게 붙잡혀 배로 이송되어 부산 동래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수감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용소 내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문명철은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 여기서 맹의순을 만나게 된다. 그가 쓴 『슬픔도 고통도 짜우짜우』란 책에서 맹의순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맹의순 선생, 그분은 한국신학교(조선신학교) 학생이었다. 훤칠한 키에 인물도 특출하게 잘 생겼으며 어학에 소질이 있어 영어, 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또한 헬라어도 참 잘했다. 스포츠를 즐겼으며, 음악과 문학도 뛰어났다. 맹 선생은 피아노도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듯했다. 그 광야교회에는 피아노 대신 오르간 한 대가 있었다. 맹 선생이 오르간을 칠 때는 마치 헨델이나 쇼팽이 악기를 다루는 듯 듣는 이가 도취될 정도였다. 그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은혜가 됐으며, 회개가 저절로 솟아나왔다. 그는 유능한 설교가로 문장력과 표현력이 뛰어났다. 때론 잔잔한 호수같이 호소하는가 하면 밀려오는 거센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듯 몰아치기도 하였다. 가슴으로 전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의 설교시간이면 많은 포로들이 자리다툼을 할 정도였다. 그는 설교를 잘 할 뿐 아니라 설교대로 그대로 사는 분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설교였다. 그는 밥 한 그릇을 받아 오다가도 누가 배고파하면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밤에도 종종 중환자를 찾아가 그들의 발을 씻겨주고 위로를 하며, 그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달려가 도와주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맹의순을 기억하는 한용택, 이희원, 문명철을 통해 맹의순의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포로수용소에서 맹의순은 참된 스승이자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한 사람이었다. 맹의순과 함께한 세 사람의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그들이 기억하는 맹의순의 삶은 한결같았고, 맹의순이 보여준 진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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