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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3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4:22 수정 2026.01.15 14:22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목사 인물열전; ① 맹의순과 이규호 연재 3
양재한 은퇴장로(한빛교회)
문학박사, 전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현 재단법인 창원YMCA 법인이사장

2. 한국전쟁 시절 맹의순과 이규호

1) 만남
이때 한얼중학교에 내려왔던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희대의 김동길, 이근섭, 조선신학교의 이규호, 맹의순, 이화여대의 우보영, 서울대 농대의 최죽송 등이었다. 후일 한얼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이규호는 맹의순과 함께한 한얼중학교에서의 봉사활동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해에 나는 맹군과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이 한얼학교에 가서 여름방학 동안 지낸 일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늘 한얼학교와 강성갑 교장이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우리가 한얼학교에 갔을 때에 뜻을 같이한다고는 했지만 여러 대학들에서 남녀학생들이 모여든 봉사대였기 때문에 공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곤 했었다. 맹군은 그런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강성갑 교장의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정열이 단순히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러나 현실에 때묻지 않은 그의 순수성을 우리는 좋아했었다(이규호, ‘천리길의 행진’, 116).
이규호는 그의 책에서 ‘나의 친구 맹군(맹의순을 지칭)은 연세대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조선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적인 수준도 매우 높고 도덕적인 수준도 퍽 높은 그런 친구였다. 평범한 기독교인도 아니고 질적으로 매우 높은 종교적인 의식을 다듬고 있는 그런 신학도였다’고 회상하는 것으로 봐 친구이상의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규호의 『삶의 철학』에서 조선신학교 재학시절 맹의순과 여학생 ‘재금’을 함께 사랑했던 ‘사랑 이야기’, 두 사람의 우정이 한 여인에 대한 정서적인 사랑보다 더 두터워 함께 그 여인을 떠난 애절한 얘기도 담고 있다.
사실은 우리는 함께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사랑이라면 매우 이질적인 또는 너무나 성숙한 그런 애정을 한 사람의 여인에게 쏟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둘은 조금도 거리낌 없는 친구였다. 그 여인은 이름난 문필가의 딸이면서 스스로 매우 훌륭한 문장가였다. 종교에 대한 상당히 높은 교양을 갖추고 있으면서 사교에 있어서도 매우 성숙한 여인이었다. 높은 교양과 부드러운 사교, 그리고 종교적인 신앙에서의 동경, 이런 것들이 그 여인의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그녀를 경계했다. 특히 맹군은 나보다도 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좋아하면서도 미워하는 그의 태도를 더 분명하게 나타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여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여인을 떠났다. 어쨌든 두 사람의 우정이 그 여인과의 정서적인 관계보다도 더 두터웠는지 모른다(이규호, ‘6·25전쟁의 회상’, 112-113).
위 이규호의 글은 그가 조선신학교에 입학한 1947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란길에 나서기 전의 사랑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쓴 맹의순의 1952년 1월 25일자 일기는 2년여의 세월이 흘러 결혼까지 한 첫사랑 재금을 잊지 못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순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어찌하여 옛 생각을 또 하게 되었나? 첫사랑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던가? 재금이를 자주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벌써 남과 결혼한 여자를, 나는 나 자신이 미련없는 총각인 줄 알면서도, 법칙을 모르는 마음의 야속함이여(1952. 1. 25(금)).
한 여인 ‘재금’을 두고 함께 사랑한 맹의순과 이규호의 우정은 여인과의 정서적 사랑의 관계보다 더 친밀하고 강열했는지도 모른다. 이즈음 규호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서울 역전 동자동 언덕에 있는 교회당(서울성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목사님(송창근 목사)께서 ‘이 자리에 군인들이 있으면 빨리 본대로 돌아가시오’ 라는 광고를 듣고 남북간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독서애호가인 규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빌려준 책을 되돌려 받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당시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나의 책을 발려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피란을 가면 내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걱정이 되어서 책들 돌려받으러 이 집 저 집 찾아다녔다. 그래서 지금도 그 당시의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나를 ‘그 혼란 속에서 책 찾아다니던 사람’ 이라고 말하곤 한다(이규호, ‘6·25전쟁의 회상’, 109).
[사진] 가운데가 맹의순(출처: 데일리 굿 뉴스, 2023.2.13)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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