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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금빛등대 - 내가 죽으면 누가 문상을 올까?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4:23 수정 2026.01.15 14:23

내가 죽으면 누가 문상을 올까?
이윤민 목사
금빛교회

세상은 참 희한하기도 하고 사람은 정말 여러 질이기도 하다. 인도에 사는 70대 공군 은퇴 장교 모한 랄(74세)은 자기가 죽으면 누가 오나 보려고 가짜 장례식을 치루어 보았다. 진짜 죽은 것처럼 장례식을 치러다가 화장하기 직전 벌떡 일어나 문상객들을 놀라게 했다. 15일(현지시각) 인디아 타임스 등 외신이 전한 보도다.
“내가 죽으면 과연 누가 문상을 올까?” 조금은 씁쓸하지만 이런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 평소 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 중 몇이나 내 죽음을 마음으로 애도할까? 누군가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일 것이고 누군가는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지”라며 짧게 추억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사실 인간의 죽음은 생각보다 ‘조용한 사건’이다. 누군가의 세상은 무너졌는데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간다. “내가 죽으면 누가 문상을 올까?”라는 물음은 단지 장례식장의 풍경을 묻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가?”“나의 삶은 누군가에게 진정 의미 있는 존재인가?”를 되묻는 자기반성이다.
현대사회는 관계의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제 속은 텅 비어 있다. 수백 명의 연락처, 수천 명의 SNS 친구, 수많은 ‘좋아요’와 ‘하트’가 있지만 진심으로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삶의 끝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는 숫자가 아니라 진심의 깊이로 판가름 나게 된다. 인간관계의 민낯과 삶의 허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조건 없는 헌신’이었다. 그분은 생전에 자신을 따르던 군중의 환호를 받았지만 십자가의 자리에는 몇몇 여인들과 제자 요한만이 남았다. 죽음의 순간에는 ‘진짜 관계’만이 남는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어두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묵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삶’을 산다. 성경의 지혜자는 말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것이 모든 사람의 끝이기 때문이라. (전도서 7:2)”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다.
죽음이란 명예나 이익, 비교와 경쟁으로 가득 찬 삶의 껍질이 벗겨지고 ‘사랑’,‘용서’, ‘감사’,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남는 작업이다. 한 수도승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애썼다.” 이 고백은 화려하진 않지만 진실하다. 죽음의 리허설과 삶의 균형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분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안다. 삶은 순간이고 죽음은 영원이다. 그러나 그 영원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오늘이다. “내가 죽으면 누가 문상을 올까?” 그 질문의 답은 “내가 지금 얼마나 사랑하며 진실된 삶을 살고 있냐”에 달려 있다.
“죽음을 묵상하되 삶을 사랑하라.”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참된 의미다. 죽음을 묻는 일은 삶을 성찰하는 일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천국과 지옥을 알고 사는 사람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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