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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교회에서 출석1천명 교인이 되기까지 - 박석환 목사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4:29 수정 2026.01.15 14:29

흙수저도 사용하신다
박석환 목사
장유 소금과빛교회

목사에게 자격의 요구조건이 있을까? 만약에 자격을 요구한다면 정말로 자신이 없다. 나는 경남 고성군 영현면 신분리 시골에서 태어났다. 하루 2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지나갔다. 어릴적 추억은 여름방학이면 산에 소 먹이러 갔고, 겨울에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 밤하늘에는 개똥벌레(반딧불)도 많았고, 별들도 많아서 친구들과 별자리를 찾기도 했고, 별똥(유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한마디로 오염되지 않은 시골이었다. 어릴 적 시골 환경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TV도 없었다. 유일하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곳이 교회였다. 교회 가면 노래, 율동,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 다니면 성탄절 날 상(賞)도 주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교회 열심히 다녔고, 전도도 열심히 했다. 교회 선생님들이 칭찬을 많이 해주니까 교회가 더 좋았다. 어릴 때 막연한 꿈은 저 먼 나라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보고 싶었다. 교회 선생님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했다. 믿음으로 기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게 해 달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꿈이지 현실은 전혀 환경이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을 못 갔다. 부모님이 돈 걱정하실까 봐 수학여행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서울로 가는 수학여행도 부모님이 돈 걱정 하실까 봐 말하지 않았다. 아마 철이 좀 일찍 든 것 같다. 그러면서 빨리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돈 많이 벌 생각을 했다. 1970년대 원양어선을 타고 온 동네 형님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났다. 나도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수단으로 부산 해양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대학을 가는 조건이었다. 차마 부모님께 대학을 보내 달라는 말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는 고3일 때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뉘게 된다. 이때 대부분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배를 타고 원양 실습을 나갔다. 사실 나는 직접 돈 벌어 진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배를 탔다. 그래서 실습생으로 태평양 참치 잡는 원양어선을 타게 되었다. 난생처음 타 본 원양어선은 처음에는 배 멀미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리고 망망한 대해에서 파도와 싸우고, 고독한 외로움과 위험으로부터 싸움이었다. 이때 느끼고 깨달은 것이 돌아가면 꼭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약 4개월의 원양실습을 마치고, 받은 월급으로 종합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때는 실업계 출신은 동일 계열의 대학 진학에 혜택을 주었다. 다행히 목포 해양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해양대학을 선택한 동기는 국가에서 수업료, 교복, 기숙사 모든 경비를 무료로 제공해 주고, 졸업하면 100% 취업이 된다는 것이 큰 호감이었다. 사실 이만한 조건의 대학은 사관학교 외에는 없었다.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선박 기관사로서 약 8년간 상선(商船)을 탔다. 어릴 때 막연한 꿈이 현실이 되었다. 전 세계 약 40개국을 항해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나라들을 가보았다. 가난한 시골 아이가 돈 없어서 수학여행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타 문화를 경험하고, 꿈과 비전을 키울 수 있었다. 감사한 것은 항해 중 선박에서 주일날 선원들과 예배를 드렸다. 무어라고 설교했는지 모르지만 안전 항해와 안전을 지켜 달라고 기도했다. 이 모든 것이 어릴 때 기도했던 기도 응답인 것이다. 직급이 1등 기관사까지 했는데, 그 당시 육지에서 받는 월급의 3배 정도 되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돈 관리는 도와 달라는 형제들이 너무 많았다. 겨우 저축한 돈이 부산 변두리 집 두 채가 전부였다. 1988년 결혼을 준비하면서 선박 생활을 청산했다. 고향 교회 목사님의 중매로 한 자매를 소개받아 약 1년간 교제 끝에 결혼 하게 되었다.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선교와 교회 사역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든든한 재정 후원자가 되었다. 여호와이레의 감사한 일이다.
1988년 한국에는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복음선교선 한나호(M/V Hannah)가 들어왔다. 해외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한 선교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선박을 관리할 평신도 전문 선교사가 없어서 잠시 자원봉사자로 시작한 선교사역이 약 10년간 선박 선교사로 봉사 하게 되었다. 평신도 선교사역의 한계를 깨닫고 신학교를 가게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와 선교사역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한나호(M/V Hannah)가 남태평양 마이크로네시아 작은 섬들을 항해하며 선교해야 하는데 배를 운항할 기관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신학교는 개교기념일과 공휴일이 겹쳐서 약 1주일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비행기로 남태평양 팔라우에 가서 작은 섬들까지 항해를 돕는 일을 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지나고 보면 신학생이 항해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 큰 위험 부담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 같았다. 필자는 신학교 동기들보다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지금도 형님 목사로 호칭되고 있다. 문제는 부 교역자로서 나이가 많다 보니 가고 싶은 곳은 많지만, 오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부산 대저에서 약 6년간 부 교역자로 섬기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부 교역자로 은퇴하고 싶었다. 그러나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이 생겼다. 막상 교회 사역을 사임하고 보니 임지(任地)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개척교회를 결심하게 되었다. 개척교회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직장에서 벌었던 전 재산인 집을 팔아 온전히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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