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많은 생각의 산물이다. 그 방식도 부지기수다. 나름대로의 터득이 필요하다. 삶의 방식도 다양하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선각자들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 현실이다. 이러고 보니 필자같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칼럼을 쓴다는 것이 분에 넘치는 분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날씨 탓일까. 이번 주에도 무엇을 쓸까 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아는 목사님이 보내온 카톡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망설임 없이 이번 주 칼럼 주제로 선택했다. 그 전문(全文)을 칼럼 스타일에 맞게 수정하여 옮긴다. 부족한 저의 글보다 천 배 만 배 더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눈물 나도록 살아라”(Live to the point of tears). 이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다. 카뮈는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라’는 의미로 이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에 더욱 실감나게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은 영국의 여류 작가 샬롯 키틀리(Charlotte Kitley)다.
인생 삶에서 진수를 느끼게 한 그녀의 유언장 같은 글을 소개하려 한다. 그녀가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는데, 그 후 암세포가 더 번져 온갖 치료를 다 받아봤지만 안타깝게도 남편과 5살, 3살짜리 자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가 죽으면서 블로그에 마지막 글을 올렸는데 그 글 내용이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이렇게도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는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 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렇더라구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딲으라고 소리 지르는 나날들이 모두가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 봤습니다. 기본적 의학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어요. 한방에 가서 침도 맞아 봤지요. 그런데 모두 아니더라구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절대 주권자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 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 주고 뽀뽀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얼마 후엔 남편의 곁에서 잠이 깬 이른 아침의 기쁨과 행복을 잃게 될 것이고, 남편은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한 잔이면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게 되겠지요.
의사로부터 6개월 사망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22개월을 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넘게 더 보너스로 얻은 덕분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가슴에 품고 떠나갈 수 있게 됐어요. 아이의 흔들거리던 이기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 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갈 때가 되니 지난 시간 모두가 감사할 뿐이네요.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중년의 복부비만 같은 거, 늘어나는 허리둘레 같은 거, 그거 한 번 가져 봤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살아 남는다는 얘기잖습니까. 저는 한 번 늙어보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네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샬롯 키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