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칼럼

금빛등대 - 당신과 나 사이에

크리스천경남 기자 입력 2026.01.15 15:16 수정 2026.01.15 15:16

당신과 나 사이에
이윤민 목사
금빛교회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60년대 필자가 대학생이었을 때 라디오만 켜면 흘러나오던 남진 씨의 ‘가슴 아프게’의 첫 구절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더니만 저 바다 때문에 이별하게 됐다는 하소연이다. 나는 어떠했고 너는 어떠했다는 반성 없는 가슴만 있을 뿐이다.

한국의 돌아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자기 유익을 챙긴다. 머릿속으로 ‘설마’했던 일들이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불합리함을 지적하면 예민하다는 소리나 듣고 양심을 지키려면 도태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내일 일에는 별 관심도 없다. 그저 이 순간에 관심을 쏟을 뿐이다. 국가의 장래는 아예 관심도 없는 모습이다. 우선 내 배만 부르고 등만 따뜻하면 만사 OK다. 이런 삶 속에 예수가 자리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웃고픈 현실 앞에 방향타를 놓쳐버린 발걸음들이 헛발질만 하고 있다.
교회의 현실인들 별수 있겠는가. 세속에 찌든 인간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내 배를 채워주는 예수는 필요해도 십자가를 지자는 예수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내 소원을 들어주는 주님은 꼭 필요한데 내 뜻에 반대하는 예수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다.
교회도 어느덧 성공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교회당 크기가 목사의 성공 잣대가 되어 버렸다. 갈릴리로 가자는 주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살잔다. 지금 이 자리가 천국보다 더 좋은데 천국은 무슨 천국이며 그곳에 가기 위한 훈련은 힘 드는 데 왜 해야 하느냐며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어느 흑인이 급한 일이 생겨 일을 처리하다가 그만 출석하는 교회가 멀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백인 교회로 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반겨 주기는커녕 인사하나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눈치가 보여 교회당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가 흑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눈을 떠 보니 바로 주님이셨다. 깜짝 놀란 흑인은 주님은 왜 예배당에 안 들어가시고 여기 계시느냐고 물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나도 차별이 하도 심한 이 교회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항상 밖에 서서 예배를 드리고 있단다.“
성속(聖俗)을 떠나 이렇게 타락하게 된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나를 돌아보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내 잘못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것도 개입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직 1:1의 관계를 원하신다. 영원히 이별 없는 삶으로 함께하시기를 원하실 뿐이다.
하나님을 바로 만난 다윗의 고백은 이랬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 1-3)
남진의 노랫말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있었지만 내 삶이 바뀌니까 이별은 없었다네.“ 하나님과 우리를 이별하게 만든 그 어떤 것도 다 없애려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희생이 바로 종려주일이고 성 금요일의 핵심이다.



저작권자 크리스천경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